1920년에 태어나 한 세기를 넘게 살아온 사람이 있다. 일제강점기, 해방, 한국전쟁, 산업화, 민주화, 그리고 AI 시대까지. 대한민국의 모든 역사적 굴곡을 자신의 몸으로 관통한 이 사람은 연세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김형석(金亨錫)이다.
그는 65세에 정년퇴임한 뒤 "내 인생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선언했다. 90세에는 마지막 순간을 준비하려 했지만, 멈추지 않고 글을 쓰고 강연을 이어갔다. 그 결과 103세에 책을 출간해 기네스 세계기록 '최고령 남성 저자'에 등재됐고, 105세에 또 한 권의 신간을 펴내며 스스로 그 기록을 경신했다.
세는 나이로 107세를 맞이한 2026년, 그가 세상에 전한 메시지는 놀랍도록 단순하다. 60 - 70대 삶을 일찍 계획할 것, 평생에 걸쳐 공부할 것, 세상에 도움되는 일을 할 것. 이 세 가지가 진짜 나를 만들어주고, 오래 지속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이 글에서는 한 세기를 살아낸 철학자의 삶과 가치관, 집필 이력, 기네스 기록, 그리고 그가 들려주는 인생의 원칙을 깊이 있게 다룬다.
김형석 교수는 누구인가 — 한국 1세대 철학자의 105년
출생과 성장: 격동의 시대를 건넌 소년
김형석은 1920년 4월 23일 평안북도 운산에서 태어나 평안남도 대동군 송산리에서 자랐다. 그의 유년기는 역사 그 자체와 맞닿아 있다. 김일성 주석과 초등학교 선후배였고, 윤동주 시인과 평양 숭실중학교 동문이었으며, 감옥에서 출소한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마지막 설교를 17세 때 직접 들었다.
평양 숭실중학교에서 평양제3공립중학교로 옮긴 뒤, 일본 조치(上智)대학교 철학과에 진학했다. 일본 유학 시절의 경험은 그의 평생 사상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서양 철학과 기독교 사상의 융합이라는 그만의 학문적 토대가 이 시기에 형성됐다.
교육자에서 명예교수까지
1947년 탈북 후 서울에 정착한 김형석은 7년간 서울 중앙중·고등학교에서 교사와 교감으로 근무했다. 이후 1954년부터 1985년까지 연세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30여 년간 후학을 길렀다. 미국 시카고대학교와 하버드대학교에서 연구 교환 교수를 역임하기도 했다.
| 시기 | 주요 이력 |
|---|---|
| 1920년 | 평안북도 운산 출생 |
| 1943년 | 일본 조치대학교 철학과 졸업 |
| 1947년 | 탈북 후 서울 정착 |
| 1947 - 1954년 | 서울 중앙중·고등학교 교사·교감 |
| 1954 - 1985년 | 연세대학교 철학과 교수 |
| 1985년(65세) | 정년퇴임, "인생 2막" 선언 |
| 2024년 9월 | 기네스 세계기록 '최고령 남성 저자' 등재 |
| 2025년 11월 | 신간 《김형석, 백 년의 유산》 출간 |
김형석 교수의 삶에서 주목할 점은 65세 정년퇴임 이후 40년 넘게 '현역'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이다. 집필과 강연만으로 35년 이상 인생의 두 번째 막을 이어간 그의 사례는, 은퇴 이후 삶의 방향을 고민하는 5060세대에게 구체적인 롤모델이 된다.
기네스 세계기록 — 103세 251일, 세계 최고령 남성 저자
기록 등재 과정
2024년 5월 출간된 《김형석, 백 년의 지혜》가 기네스 기록의 시작점이 됐다. 이 책의 출간 소식을 접한 김형석 교수의 외손녀가 기네스북 측에 직접 서류를 제출했고, 심사를 거쳐 2024년 9월 공식 등재가 확정됐다. 당시 그가 세운 기록은 103세 251일로, '세계 최고령 남성 저자(Oldest Male Author)'라는 타이틀을 획득했다.
기네스북 등재 이전에도 이미 최고령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공식 인증 절차를 거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등재 이후 기네스 측은 직접 증서를 발급했으며, 이 소식은 국내외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자기 기록 경신: 105세의 신간
기네스 등재 이후 약 1년 뒤인 2025년 11월 12일, 김형석 교수는 만 105세의 나이로 《김형석, 백 년의 유산》을 출간하며 자신이 세운 기네스 기록을 스스로 경신했다. 이 책은 철학과 종교, 죽음과 삶, 사회와 공동체를 아우르는 사유를 담고 있으며, 전작 《백 년의 지혜》보다 더 젊은 30 - 40대 독자까지 겨냥해 집필됐다.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내가 살아보니 100세는 아무것도 아닌 듯하다"며, "사람이 언제 늙는고 하니, 이제 늙었다고 생각할 때 늙는 것"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기네스 기록의 '최고령 저자'는 단순히 나이가 많은 작가가 아니라, 해당 나이에 신작을 집필·출간한 사실이 검증되어야 인정된다. 과거 집필한 책의 재출간이나 개정판은 기록 대상에서 제외되며, 완전히 새로운 원고를 작성해야 한다는 점이 핵심이다.
대표 저서와 집필 활동 — 60년간 이어진 글쓰기의 여정
김형석 교수의 저작 활동은 1960년대부터 현재까지 60년 이상 이어지고 있다. 교보문고 기준 그의 이름으로 검색되는 도서는 100권을 훌쩍 넘는다. 철학 개론서부터 수필, 인생론, 신앙 에세이까지 장르도 폭넓다.
초기 대표작: 불후의 명작 두 편
1960년에 출간된 첫 수필집 《고독이라는 병》은 피천득의 《인연》의 뒤를 잇는 한국 수필 문학의 명작으로 평가받았다. 이태 뒤인 1962년에 나온 《영원과 사랑의 대화》는 1960년대 초대형 베스트셀러로, 60만 부 이상 판매되며 한국 에세이의 역사를 새로 썼다. 이 두 작품은 6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개정판으로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90대 이후 저작: 멈추지 않는 펜
90대에 접어든 뒤에도 집필 속도는 줄지 않았다. 97세에 쓴 《백년을 살아보니》는 TV 프로그램 '인간극장' 출연과 맞물려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며, 이후 《100세 철학자의 행복론》, 《100세 철학자의 사랑수업》, 《김형석 교수를 만든 백년의 독서》 등을 연이어 출간했다.
| 출간 시기 | 대표 저서 | 핵심 내용 |
|---|---|---|
| 1960년 | 《고독이라는 병》 | 한국 수필 문학의 고전, 사랑과 고독의 철학 |
| 1962년 | 《영원과 사랑의 대화》 | 60만 부 베스트셀러, 인간학 에세이 |
| 2016년(97세) | 《백년을 살아보니》 | 100세 시대 인생론 베스트셀러 |
| 2024년(104세) | 《김형석, 백 년의 지혜》 | 기네스 등재 계기, 세기의 인생론 |
| 2025년(105세) | 《김형석, 백 년의 유산》 | 최후의 인간학, 기네스 기록 셀프 경신 |
김형석 교수의 독서 습관도 주목할 만하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파스칼의 《팡세》,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를 인생을 바꾼 책으로 꼽는다. 그의 저서 《백년의 독서》에서 이 책들이 자신의 사유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상세히 다루고 있다.
김형석 교수의 3가지 인생 원칙 — 107세가 전하는 메시지
107세를 맞이한 그가 거듭 강조하는 메시지는 세 가지 원칙으로 압축된다.
원칙 1: 60 - 70대의 삶을 일찍 계획하라
김형석 교수는 "인생의 황금기는 60세에서 75세"라고 단언한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자녀 양육과 직장 생활의 의무에서 벗어나 비로소 '자기 자신을 위한 시간'이 주어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는 65세 정년퇴임 송별회에서 참석한 교수들에게 "내일부터 진짜 인생이 시작된다"고 말했고, 이후 40년간 강연과 집필로 그 말을 증명해왔다.
하지만 이 황금기를 누리려면 30 - 40대부터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은퇴 후 무엇을 하며 살 것인지 구체적인 계획 없이 맞이하는 노년은 급격한 건강 악화와 고립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원칙 2: 평생에 걸쳐 공부하라
그에게 공부란 단순히 지식을 쌓는 행위가 아니다. "정신적으로 성장하는 동안은 늙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핵심 주장이다. 실제로 그는 100세가 넘은 지금도 매일 독서와 집필을 이어가고 있으며, 새로운 사회 현상에 대한 의견을 내놓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2025년 신간 기자간담회에서는 AI 시대에 대한 견해까지 밝혔다. "인간은 AI에 지배당해서는 안 된다"는 발언은 105세 철학자가 최신 기술 트렌드까지 놓치지 않고 공부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원칙 3: 세상에 도움되는 일을 하라
"이기적인 사람일수록 노년이 힘들다"는 그의 말은 수십 년의 관찰에서 나온 결론이다. 그는 주변에 돌려주는 사람이 진정한 성공자라고 정의한다.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삶은 사회적 관계가 끊기면서 고립과 우울로 이어지지만, 세상에 기여하는 삶은 끊임없이 사람과 연결되고 의미를 만들어낸다.
김형석 교수는 이 세 가지 원칙이 장수의 비결과도 직결된다고 말한다. 삶의 목적이 있는 사람은 아침에 일어날 이유가 생기고, 공부하는 사람은 뇌가 퇴화하지 않으며, 타인을 돕는 사람은 사회적 유대가 끊어지지 않는다. 이 세 가지가 동시에 작동할 때 신체적·정신적 건강이 유지된다는 것이 그의 100년짜리 결론이다.
장수의 비결 — 50년간 지켜온 생활 습관
김형석 교수의 장수 비결은 특별한 건강식이나 고가의 관리가 아니다. 병약한 체질로 태어나 어머니가 "스무 살까지만 살아도 좋겠다"고 말했을 정도였지만, 그는 자신만의 생활 습관을 50년 넘게 유지하며 105세를 넘겼다.
아침 식단은 수십 년째 동일하다. 우유 반 잔, 호박죽 반 접시, 계란 반숙 한 개, 찐 감자, 드레싱 없는 야채 샐러드, 그리고 제철 과일. 저녁은 7시 반 이후에 최대한 늦게 먹는다.
운동은 매일 한 시간 걷기가 전부다. 50세 중반부터 시작한 이 습관을 50년 넘게 하루도 빠짐없이 이어왔다. 등산이나 격한 운동 대신 꾸준한 걷기만으로 하체 근력과 관절 건강을 유지해왔다.
그가 말하는 장수의 정신적 비결은 "남을 욕하지 않는 것"과 "화내지 않는 것"이다. 부정적 감정을 최소화하고, 일과 소통 속에서 활력을 유지하는 것이 그의 방식이다.
| 습관 | 구체적 실천 | 유지 기간 |
|---|---|---|
| 아침 식단 | 우유·호박죽·반숙란·샐러드·과일 | 수십 년 |
| 운동 | 매일 1시간 걷기 | 50년 이상 |
| 정신 건강 | 남 욕하지 않기, 화내지 않기 | 평생 |
| 지적 활동 | 매일 독서·집필 | 60년 이상 |
| 사회적 연결 | 강연·인터뷰·교류 | 은퇴 후 40년 |
김형석 교수가 강조하는 건강 관리의 시작점은 50대다. 그는 "50세가 넘으면 건강에 신경을 쓰기 시작해야 한다. 그래야 90세까지는 건강하게 갈 수 있다"고 여러 차례 반복했다. 30 - 40대에 무리하게 일하다가 50대에 건강을 잃는 패턴이 가장 위험하다는 것이 그의 관찰이다.
1920년에 태어나 3.1운동의 그해와 함께 시작된 한 인간의 여정이, 2026년 107세에 이르러서도 멈추지 않고 있다. 김형석 교수의 삶은 단순한 장수 사례가 아니다. 65세 이후의 삶을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인간은 30년, 40년을 더 성장할 수 있다는 살아있는 증거다.
그가 남긴 세 가지 원칙은 거창하지 않다. 미리 계획하고, 끊임없이 배우고, 세상에 기여하라. 이것은 100세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세대에게 유효한 메시지다. 당장 은퇴가 아니더라도 지금부터 "60대의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를 스스로에게 물어볼 때다.
김형석 교수의 저서 중 한 권을 골라 읽어보는 것이 좋은 시작이 될 수 있다. 97세에 쓴 《백년을 살아보니》는 가장 접근하기 쉬운 입문서이고, 1960년대 명작 《영원과 사랑의 대화》는 시대를 초월한 인간학의 정수를 담고 있다. 100년을 산 사람의 말에는 어떤 이론서도 따라올 수 없는 무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