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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의 15가지 죄악과 군인 안중근의 전쟁 | 1909년 하얼빈 의거의 진실

2026년 3월 29일 09:22·8 views·9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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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농민의 아들에서 제국의 설계자로 — 이토 히로부미의 야망이 싹튼 과정 2 을사늑약부터 군대 해산까지 —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에 저지른 구체적 만행 3 안중근이 법정에서 밝힌 이토 히로부미의 15가지 죄목 — 그 실체 4 침착한 군인의 전쟁 — 하얼빈 의거의 전술적 치밀함
5 미완의 유산 — 동양평화론과 안중근의 꿈 6 기록이 증명하는 것 — 안중근은 테러리스트가 아니다 7 자주 묻는 질문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하얼빈역 1번 플랫폼. 러시아 의장대와 일본인 환영 인파가 가득한 그곳에 한 남자가 침착하게 서 있었다.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그의 손에 들린 FN M1900 권총이 불을 뿜자,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는 쓰러졌다.

이 사건은 단순한 암살이 아니었다. 국권을 강탈당한 나라의 군인이 적장을 처단한 전쟁 행위였다. 그런데 11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토 히로부미가 정확히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안중근이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지를 온전히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 글에서는 이토 히로부미의 출생부터 대한제국 침탈까지의 행적을 낱낱이 파헤치고, 안중근이 법정에서 밝힌 15가지 죄목의 실체를 구체적 사료와 함께 재구성한다.

구분핵심 내용
이토 히로부미 생몰1841년 10월 16일 - 1909년 10월 26일
주요 직위일본 초대 내각총리대신, 초대 한국통감
핵심 만행을사늑약 강제체결, 고종 강제퇴위, 군대해산, 의병 학살 지휘
안중근 의거일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의거 장소중국 하얼빈역 1번 플랫폼
사용 무기벨기에제 FN M1900 권총 (7.65mm)
안중근 순국일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15분
1

농민의 아들에서 제국의 설계자로 — 이토 히로부미의 야망이 싹튼 과정

이토 히로부미는 1841년 10월 16일 일본 조슈번(현 야마구치현) 스오국 구마게군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래 성은 하야시(林), 어린 시절 이름은 하야시 리스케(林利助)였다. 그의 아버지가 하급 무사 집안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이토라는 성을 얻었고, 이 신분 상승이 훗날 그의 정치 인생 출발점이 된다.

당시 일본 사회는 아편전쟁(1840-1842)의 충격파 속에 있었다.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여겨지던 청나라가 영국에 무참히 패하는 모습을 목격한 일본 엘리트 청년들은 극심한 위기의식에 사로잡혔다. 이토 역시 그중 하나였다. 1863년 조슈번의 방침에 따라 영국 밀항 유학길에 올랐고, 런던에서 서구 산업문명의 압도적 위력을 체감했다. 비록 6개월 만에 돌아왔으나, 이 경험은 그에게 "일본을 서구와 대등한 근대국가로 만들겠다"는 야망을 심어주었다.

귀국 후 메이지유신의 핵심 인물로 부상한 이토는 1882년 다시 유럽으로 건너가 독일의 비스마르크 헌법을 집중 연구했다. 약 18개월간의 유학 끝에 1885년 일본 최초의 내각제를 설계하고 초대 내각총리대신에 올랐다. 이후 1889년 메이지 헌법을 기초하면서 근대 일본의 법적·제도적 골격을 사실상 혼자 설계했다. 일본 국회의사당 중앙홀에 세워진 세 인물의 동상 가운데 하나가 이토 히로부미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 TIP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에서 '근대국가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4차례나 총리를 역임했고, 일본 헌법과 의회 제도의 기초를 닦았다. 그러나 이 '근대화'의 에너지는 곧바로 이웃 나라를 침략하는 제국주의로 전환되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문제는 이토가 구상한 '강한 일본'의 청사진에 한반도가 반드시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러일전쟁(1904-1905)에서 승리한 일본은 아시아에서 서구 열강을 물리친 최초의 비서구 국가로 부상했고, 이토는 이 승리를 한반도 지배의 발판으로 삼았다.

2

을사늑약부터 군대 해산까지 —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에 저지른 구체적 만행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에 가한 침략은 단발적 사건이 아니라 치밀하게 단계를 밟은 조직적 국권 강탈이었다. 외교권 박탈, 황제 교체, 군대 해산, 내정 장악, 경제 침탈, 그리고 무차별 학살까지 — 그 과정을 시간 순서대로 추적하면 한 제국이 어떻게 체계적으로 해체되는지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2.1

1905년 — 을사늑약과 외교권 강탈

러일전쟁 승리 직후인 1905년 11월 17일, 이토 히로부미는 특파전권대사 자격으로 서울에 왔다. 일본군이 경운궁(덕수궁)을 포위한 가운데,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며 조약 체결을 강요했다. 고종은 끝까지 서명을 거부했다. 그러나 이완용, 박제순 등 을사오적이 일본 편에 서면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강탈당했다.

을사늑약 핵심 내용상세
외교권 박탈대한제국의 모든 외교 관계를 일본 외무성이 관리
통감부 설치서울에 통감부를 두고 일본이 한국 정치를 직접 통제
초대 통감이토 히로부미 본인이 부임
국제법적 평가국가 원수의 서명 없이 체결, 조약으로서 원천 무효

일본의 한 국제법 교수는 이 조약에 대해 "국제법적으로 조약이라 할 수도 없다"고 단언한 바 있다. 고종 황제의 서명도 국새 날인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토는 이 불법 조약을 근거로 대한제국의 외교 창구를 완전히 틀어막았다.

⚠️ 주의

을사늑약을 '을사조약'이라 부르는 것 자체가 논쟁의 대상이다. '조약'이란 양측의 합의를 전제하지만, 을사늑약은 군사적 강압 하에 이루어진 것으로 한국 측에서는 '늑약(勒約, 강제로 맺어진 약속)'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고 본다.

2.2

1907년 — 고종 강제퇴위와 정미7조약

고종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이를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다. 이완용, 송병준 등 친일파와 합세해 고종을 협박했고, 내관을 대역으로 세운 가짜 양위식까지 연출했다.

고종이 물러난 직후 체결된 정미7조약(한일신협약)은 대한제국의 내정까지 일본에 넘기는 결정적 조약이었다. 주요 부처의 차관 자리를 일본인으로 채우는 이른바 '차관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사법권과 경찰권도 일본으로 이관되었다.

2.3

1907년 8월 — 대한제국 군대 강제 해산

정미7조약 체결 직후인 1907년 8월 1일, 이토 히로부미와 하세가와 일본군 사령관은 대한제국 군대 해산을 단행했다. 순종 황제의 해산 조칙이 발표되었으나, 이 조칙 자체가 이토와 이완용에 의해 위조된 것이었다는 사실이 후에 밝혀졌다.

서울 시위대 소속 군인들은 해산 명령에 불복하고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다. 시위대 제1대대장 박성환 참령은 권총으로 자결하며 항거했다. 결과는 처참한 패배였으나, 해산 군인 상당수가 의병에 합류하면서 전국적인 무장 항쟁이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 TIP

군대 해산은 이토 히로부미의 한반도 지배 전략에서 핵심적인 단계였다. 한 나라의 군대를 없앤다는 것은 자주 국방 능력 자체를 소멸시키는 것이며, 이후의 강제 병합을 사실상 기정사실화하는 수순이었다.

2.4

1909년 — 남한 대토벌 작전과 양민 학살

군대 해산 이후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하자, 일제는 1909년 9월부터 약 2개월간 '남한 대토벌 작전'을 실시했다. 일본 측 기록인 『조선폭도토벌지』에 따른 통계가 그 잔혹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피해 구분일본 토벌대의병 측
사망자136명17,779명
부상자277명376명
포로-2,139명

사망자 수의 비대칭이 극단적이다. 의병 17,779명 대 일본군 136명. 이것은 전투가 아니라 일방적 학살에 가까웠음을 의미한다. 의병뿐 아니라 의병을 도와준 마을 주민까지 학살 대상이 되었고, 가옥에 방화하는 초토화 전술이 자행되었다. 호남 지역이 특히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이 모든 침략 과정의 실질적 수행자이자 총지휘자였다. 통감으로서 외교·내정·군사를 모두 장악한 그는 "한국인을 위한 것"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한 나라를 체계적으로 해체했다.

2.5

경제 침탈 — 화폐 주권까지 빼앗다

이토의 침탈은 정치·군사에 그치지 않았다. 일본 제일은행은 대한제국 정부에 통보도 없이 1902년부터 자체 지폐를 발행해 한반도에 강제 유통시켰다. 안중근이 이토의 죄목 중 하나로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하게 한 죄"를 꼽은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서울 중구 한국은행 본관의 정초석에는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직접 쓴 글씨가 남아 있다. 대한제국의 화폐 주권을 강탈한 인물이 중앙은행 건물의 초석을 놓은 셈이다.

⚠️ 주의

"이토 히로부미는 한일 병합에 반대했다"는 주장이 일부 존재한다. 그러나 일본 외교문서 사료관에 보관된 기밀문서에는, 한국 병합에 대해 논의하러 찾아온 외교관에게 이토가 "전적으로 동감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반대했다는 주장은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3

안중근이 법정에서 밝힌 이토 히로부미의 15가지 죄목 — 그 실체

1910년 2월 7일, 뤼순 관동도독부 고등법원 제1호 법정. 안중근의 첫 공판이 열렸다. 그는 이 자리에서 자신이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서 적장을 사살한 교전자임을 선언했다.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의 죄목 15가지를 조목조목 열거했다.

  • 한국의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 한국 황제(고종)를 폐위시킨 죄
3. 5조약(을사늑약)과 7조약(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 무고한 한국인을 학살한 죄
  •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 철도·광산·산림·천택(川澤)을 강제로 빼앗은 죄
  •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하게 한 죄
  • 군대를 해산시킨 죄
  • 교육을 방해한 죄
  • 한국인의 외국 유학을 금지한 죄
  •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운 죄
  •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 한일 간에 경쟁이 쉬지 않아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태평무사한 것처럼 위로 일본 천황을 속인 죄
  • 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
  • 일본 천황의 아버지인 태황제(孝明天皇)를 살해한 죄
💡 TIP

안중근이 열거한 15가지 죄목은 개인적 원한이 아니라 국제법적·도덕적 차원의 고발이었다. 특히 14번 "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는 안중근의 사상적 핵심을 보여준다. 그는 일본의 침략이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의 평화를 위협하는 행위라고 인식했다.

첫 번째 죄목인 명성황후 시해(을미사변, 1895년)와 이토의 관련성은 오랫동안 논쟁거리였다. 그런데 2005년 일본 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에서 이토 히로부미와 각료들이 명성황후 시해에 개입했음을 뒷받침하는 사료가 발굴되었다. 안중근의 주장이 단순한 감정이 아닌 사실에 근거한 것이었음이 확인된 셈이다.

법정에서의 안중근은 흔들림이 없었다. 판사, 검사, 변호사 전원이 일본인이었고, 국제 변호인단의 참여는 일제 내부 방침에 의해 차단되었다. 재판의 공정성은 처음부터 기대할 수 없는 구조였다. 그럼에도 안중근은 당당하게 자신의 논리를 펼쳤다.

"나는 이토의 정책을 오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꿰뚫고 있다. 그는 황제를 협박해 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한국인을 학살했으며, 일본 천황과 세계를 속인 간웅이다. 그런 이토를 처단한 것은 개인적 원한도 무지에서도 아니라,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서 치른 전쟁이었다."

재판은 총 6차 공판, 단 일주일 만에 종결되었다. 당시 일본 법에서도 정치적 신념에 의한 살상에는 사형을 구형하지 않는 관례가 있었으나, 안중근에게는 예외가 적용되었다. 공판 시작 전에 이미 일본 외무부가 "극형에 처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지령을 내린 상태였다.

4

침착한 군인의 전쟁 — 하얼빈 의거의 전술적 치밀함

안중근의 의거는 충동적 행위가 아니었다. 군인으로서의 전술적 판단이 곳곳에 녹아 있다.

4.1

총기 선택의 과학

안중근이 선택한 FN M1900은 벨기에제 반자동 권총으로, 당시 확보 가능한 무기 중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비교 항목FN M1900 (안중근 선택)마우저 C966연발 리볼버
크기소형 (은닉 용이)20cm 이상 (은닉 곤란)중형
장전 방식탄창 교체식클립 장전실린더 장전
연사 속도극히 빠름 (1초 7발 가능)보통보통
걸림 위험스트라이커 방식 (최소)공이치기 돌출 (위험)공이치기 존재 (위험)
은닉성매우 우수매우 불량보통

품 속에서 꺼낼 때 공이치기에 걸릴 위험이 없는 스트라이커 방식, 탄창 교체로 빠른 재장전이 가능한 구조, 소형이라 옷 안에 감출 수 있는 크기 — 이 모든 조건을 충족한 총이 FN M1900이었다. 안중근은 총알 끝에 십자 홈을 파서 살상력을 극대화하는 조치까지 취했다.

4.2

의거 현장의 침착함

러시아 군경과 일본인 환영 인파로 가득한 하얼빈역은 삼엄한 경비 태세였다. 안중근은 일본인으로 위장하여 러시아 측 검문을 통과했다. 러시아 경비대는 일본 영사관의 요청으로 일본인에 대한 검색을 완화한 상태였고, 안중근은 이 틈을 이용했다.

이토가 열차에서 내려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는 순간, 안중근은 인파 속에서 정확히 이토를 식별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발사된 총탄은 모두 명중했다. 총에는 아직 탄환이 남아 있었지만, 안중근은 도주도 자결도 하지 않고 순순히 체포되었다.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외치면서.

이 행동은 그가 이 의거를 단순한 암살이 아닌 전쟁 행위로 규정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포로가 된 이후의 법정 투쟁까지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5

미완의 유산 — 동양평화론과 안중근의 꿈

뤼순 감옥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안중근은 항소하지 않았다. 항소하면 살기 위해 독립운동을 훼손하는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형 집행을 보름만 미뤄달라고 요청했다. 끝내야 할 일이 있었다.

동양평화론. 이토 히로부미가 주도한 '평화를 빙자한 침탈'이 아니라, 진정한 동양 평화를 이루는 방법을 글로 남기고자 했다. 그 핵심 내용은 놀라울 정도로 선구적이다.

  • 한·중·일 3국 대표가 참여하는 동양평화회의 개최
  • 뤼순을 개방하여 3국이 공동 관리
  • 공동은행 설립과 공용화폐 발행
  • 3국 공동 군단 편성으로 상호 안보 보장
  • 서로의 언어를 배워 자연스러운 우방 관계 구축

이 구상은 오늘날 유럽연합(EU)의 모델과 놀랍도록 유사하다. 공동화폐, 공동군, 다자간 회의체 — 1910년의 감옥에서 한 청년이 구상한 내용이 21세기 국제정치학의 자유주의적 통합 이론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그러나 일제는 형 집행 유예를 허락하지 않았다. 동양평화론은 미완의 원고로 남았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15분, 안중근은 어머니가 손수 지어 보내온 수의를 입고 뤼순 감옥 형장에 섰다. 향년 32세.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하라.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국권회복을 위하여 힘쓸 것이다."

이 유언은 아직 이행되지 못했다. 안중근의 유해는 116년이 지난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6

기록이 증명하는 것 — 안중근은 테러리스트가 아니다

안중근을 둘러싼 가장 큰 쟁점은 '테러인가, 전쟁인가'의 문제다. 이 질문에 답하려면 당시의 맥락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안중근은 1908년 일본군 포로를 국제법에 따라 풀어준 전력이 있다. 같은 논리로 자신도 전쟁 포로 대우를 요구했다. 당시 이미 존재하던 전쟁 포로 관련 국제 협약(1899년 헤이그 육전 법규)을 알고 있었고, 이를 실천했던 것이다. 일제는 이 요구를 묵살했다.

일제는 안중근의 사진을 여론전의 도구로 활용했다. 수갑과 쇠사슬로 결박한 뒤 무릎까지 꿇린 채 사진을 찍어 '흉악범'의 이미지를 만들려 했다. 잘린 손가락을 부각시킨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안중근은 1909년 11명의 동지와 함께 왼손 약지를 끊어 조국 독립을 맹세하는 단지동맹을 결성한 바 있었는데, 일제는 이를 야만적 행위로 프레이밍하려 했다.

그러나 일제의 이미지 조작은 역효과를 낳았다.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안중근의 눈빛에는 후회도 두려움도 없었다. 오히려 "이 상황을 기대한 사람"처럼 보였다. 법정에서 보여준 논리정연한 변론과 당당한 태도는 전 세계에 퍼져나갔다. 일본인 변호사조차 법정에서 안중근의 정당성을 항변할 수밖에 없었다.

💡 TIP

안중근의 행위를 식민지 지배-피지배의 상하 관계로만 보면 '개인적 원한에서 나온 테러'로 축소된다. 그러나 주권을 지키고 삶의 터전을 방어하기 위한 무장 저항은 엄연히 전쟁이다. 이 관점에서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는 침략 전쟁에 대한 저항의 한 장면이며, 세계사적으로 재해석되어야 할 사건이다.

이토 히로부미라는 인물의 본질은 이중적이다. 일본 내부에서는 근대화를 이끈 정치가였으나, 한반도에서는 명성황후 시해에 개입하고, 을사늑약을 강제하고, 황제를 끌어내리고, 군대를 해산시키고, 17,000명이 넘는 의병과 양민을 학살한 침략의 원흉이었다.

안중근이 쏜 총성은 117년이 지난 지금에도 울려 퍼진다. 그것은 약소국의 절망적인 비명이 아니라, 힘에 의한 국제 질서를 도의에 입각한 규범의 질서로 바꾸자는 외침이었다. 동양평화론에 담긴 그의 비전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안중근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유해 발굴이라는 숙제가 남아 있고, 동양평화론의 이상은 아직 실현되지 못했다. 그가 남긴 메시지를 제대로 기억하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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