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7년 음력 8월 15일, 대보름달이 환하게 떠오른 밤이었다. 전라도 남원성에서는 5만 6천여 왜군과 1만여 조명연합군·백성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성벽을 넘어온 왜군의 칼날 아래 군사와 민간인이 가리지 않고 쓰러졌다. 살아남은 자는 거의 없었다. 그리고 시신에서는 코가 잘려 나갔다.
이것이 정유재란 최대 참극으로 기록되는 남원성 전투다. 이 전투에서 숨진 약 1만 명의 시신은 한 구덩이에 합장되었고, 그것이 오늘날 사적 제272호 만인의총(萬人義塚)이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이 참극의 증거가 지금도 일본 곳곳에 문서와 무덤의 형태로 남아 있다는 점이다.
이 글에서는 남원성 전투의 전개 과정, 일본 측 원문 기록에 담긴 코베기 만행의 실체, 그리고 전쟁이 낳은 조선인 납치와 노예 매매의 비극까지 종합적으로 다룬다.
| 핵심 정보 | 내용 |
|---|---|
| 전투 일시 | 1597년(선조 30년) 음력 8월 13일 - 16일 |
| 전투 장소 | 전라도 남원성(현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
| 왜군 병력 | 좌군 5만 6천여 명 + 수군 8천여 명 |
| 조명연합군 병력 | 명군 약 3천 명 + 조선군 약 1천 명 + 백성 약 6천 명 |
| 결과 | 조명연합군 전멸, 만인의총 합장 |
| 일본 기록 코 총수 | 조선물어(朝鮮物語) 기준 21만 4,752개 |
| 현재 유산 | 사적 제272호 만인의총, 2024년 역사문화관 개관 |
- 사적 제272호 만인의총: 실제 모습 https://www.cha.go.kr/agapp/public/html/HtmlPage.do?pg=/manin/01/sub01_01.jsp&pageNo=79000000&siteCd=MANIN
남원성 전투 — 중과부적의 혈전과 전멸
정유재란은 159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4만 5천여 대군으로 조선을 재침한 전쟁이다. 임진왜란 때 호남 점령에 실패한 것을 패인으로 인식한 왜군은 이번에는 전라도를 최우선 공략 목표로 삼았다. 남원은 경상도·전라도·충청도를 잇는 교통 요충지였기에, 아군과 적군 모두에게 반드시 확보해야 할 전략 거점이었다.
그해 6월, 명나라 부총병 양원(楊元)이 요동군 3천 명을 이끌고 남원성에 도착했다. 양원은 성벽을 증축하고, 해자를 더 깊이 파며, 양마장(흙과 돌로 쌓은 울타리)에 총구멍과 포구멍까지 뚫는 등 이중삼중의 방어 체계를 구축했다. 문제는 양원이 산성인 교룡산성을 버리고 평지성인 남원성에서 적을 맞이하겠다고 고집한 점이다.
조선 측은 교룡산성을 방어 거점으로 삼는 전략을 세워두고 있었다. 산세가 험준하고 성벽도 튼튼하게 증축된 산성에서 농성전을 벌이면, 적은 수로 많은 적을 상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양원은 조선 관료와 장수들의 반대를 일축하고, 교룡산성에 비축해둔 군량과 무기까지 남원성으로 옮기도록 명령했다. "나의 계획을 변경시키려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 그의 답이었다.
남원성은 둘레 2.5km, 높이 4m의 네모반듯한 평지성으로,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중국식 읍성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평지성은 방어에 불리하다는 구조적 약점을 안고 있었다.
8월 13일, 전투가 시작되었다. 왜군은 남원성을 두 겹 세 겹으로 포위한 뒤, 잡초와 벼를 베어 만든 거대한 풀다발로 해자를 메웠다. 15일 밤, 일제히 포격을 시작하자 성 위로 탄환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정적이 흐른 뒤 바깥을 보니, 풀다발이 성벽 높이까지 쌓여 있었고, 왜군은 이를 이용해 성벽을 넘어왔다.
명나라 장수 이신방·장표·모승선이 모두 전사했다. 양원은 간신히 탈출했는데, 수행원은 117명밖에 남지 않았다. 북문을 지키던 전라병사 이복남은 탈출이 불가능해지자, 방어사 오응정·조방장 김경로·구례현감 이원춘과 함께 기름을 부은 시초 더미 위에 올라서서 불화살을 쏘게 한 뒤, 맹렬한 불길 속에서 순국했다. 군기고를 지키던 감관 박기화 역시 무기를 화약고에 운반한 뒤 스스로 불 속에 뛰어들었다.
남원성 전투에서 도주한 양원은 훗날 명나라 조정에 의해 참수되었고, 그 목이 조선에 보내졌다. 전주성에 주둔하며 구원 요청을 묵살한 명나라 유격장 진우충은 가벼운 문책만 받았는데, 조선 조정은 양원보다 진우충의 죄가 더 크다고 판단했다.
이 전투의 전사자 시신은 성 안팎에 모래알처럼 널렸다. 종군 승려 케이넨(慶念)은 8월 18일자 일기에 "남원성 주위를 보니 길가에는 죽은 사람이 모래알처럼 널려 있다.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처참한 상황이었다"고 기록했다. 살아남은 성민들이 북문 옆 큰 구덩이에 시신들을 수습하여 묻은 것이 바로 만인의총이다.
코베기 명령과 일본 원문 기록 — 3,726개의 증거
남원성 전투의 참극은 전투 자체에서 끝나지 않았다. 왜군은 시신에서 체계적으로 코를 잘라냈다. 이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유재란을 일으키며 내린 직접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히데요시의 지시 사항에는 "군인과 양민 및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참살할 것"이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코베기에 대해서는 "사람은 귀가 둘이고 코는 하나뿐이니, 사람 한 명 죽인 것을 표시하는 의미로 코 하나를 베어 바치라"고 구체적으로 지시했다. 가토 기요마사의 '고려진 각서(高麗陣覚書)'에는 "왜군 한 명당 조선인의 코가 3개씩 할당되어, 그 코가 소금에 절여 일본에 보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물어(朝鮮物語)의 남원성 기록
오카와치 히데모토가 남긴 조선물어에는 남원성 함락 이후의 만행이 구체적인 숫자와 함께 적혀 있다.
"판관은 대장이므로 머리를 그대로 보내고, 그 외에는 전부 코를 잘라 염석회를 써서 항아리에 가득 채우고, 남원의 50여 구획의 그림과 보고서를 첨부해서 일본에 진상했다. 총 머릿수는 3,726구였다."
이 기록은 남원성에서의 학살 규모를 수치로 입증하는 일본 측 1차 사료다. 대장급 인물은 머리를, 그 외 군사와 백성은 코를 잘라 소금 항아리에 넣었다는 구체적인 방법까지 기술되어 있다.
| 구분 | 내용 |
|---|---|
| 대장급(판관) | 머리(수급)를 그대로 송부 |
| 일반 군사·백성 | 코를 절단, 염석회로 절여 항아리에 보관 |
| 남원성 총 기록 수 | 3,726구 |
| 첨부 자료 | 남원 50여 구획 그림 + 보고서 |
코영수증(鼻請取狀) — 논공행상의 증거
왜군 장수들이 코를 보내면, 히데요시 휘하의 검수관이 수량을 확인한 뒤 코영수증(鼻請取狀)을 발급했다. 이 영수증은 논공행상의 기초 자료로 활용되었다. 일본 각지에서 발견된 코영수증의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발급일 | 수령 장수 | 코 수량 | 수취 지역 |
|---|---|---|---|
| 1597년 9월 18일 | 기카와 히로이에 | 1,245개 | 전라도 일대 |
| 9월 21일 | 기카와 히로이에 | 870개 | 진원현(장성군) |
| 9월 27일 | 기카와 히로이에 | 10,040개 | 영광·진원 |
| 9월 14일 | 나베시마 가츠시게 | 1,551개 | 전라도 |
| 9월 하순 | 나베시마 가츠시게 | 3,369개 | 금구·김제 |
| 9월 6일 | 구로다 나가마사 | 3,000개 | 전라도 |
| 9월 14일-30일 | 구로다 나가마사 | 2,447개 | 전라도 |
금구·김제 지역의 코영수증에는 "금구 김제의 코 3,369개를 정확히 수령했다"는 내용이 명기되어 있다. 부장급 무사 나가노(長野)는 조선인의 코를 바쳐 150석짜리 영지를 하사받았다. 코 한 자루·통발에는 1천 명에서 3천 명분의 코가 담겼다.
코영수증은 현재 일본 야마구치(山口)현 문서보관소, 오사카성 천수각, 아마기시 추월향토관 등에 보관되어 있다. 이 문서들은 정유재란 당시 코베기가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군사 행정의 일부였음을 입증한다.
가토 기요마사의 가신 혼잔 야스사다(本山安定)의 기록은 더 충격적이다. 왜군들의 무차별적 코베기를 그대로 증언하면서, 심지어 갓난아이의 코까지 베었다고 적고 있다. 종군 승려 케이넨의 조선일기에도 "8월 28일 전주를 떠나 가는 도중, 벽에서 남녀를 불문하고 죽이고 있다. 참상은 참아 두 눈으로 볼 수 없는 처참한 모습이다. 길을 가는 중에 칼에 베어 죽는 사람의 모습이요, 오장이 제대로 붙어 있는 것이 없을 정도구나"라고 기록했다.
조선물어에 집계된 전체 코 수량은 조선인 코 18만 5,738개, 명군 코 2만 9,014개, 합계 21만 4,752개에 달한다. 다만 이 수치는 기록에 남은 것만의 합산이며, 실제로는 2배에서 3배에 이를 것이라는 것이 일본 학자들의 분석이다.
히데요시 사후 일본인들은 '코무덤(鼻塚, 하나즈카)'이라는 본래 명칭이 너무 잔인하다고 판단하여 '귀무덤(耳塚, 미미즈카)'으로 이름을 바꿨다. 17세기 유학자 하야시 라잔에 의해 변경된 이 명칭은 역사적 진실을 희석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교토 코무덤과 점령지 포고문 — 만행의 체계적 증거
교토시 히가시야마구, 도요쿠니 신사(풍국신사) 정문 바로 옆에 자그마한 무덤 하나가 있다. 도요쿠니 신사는 히데요시를 신으로 모시는 신사인데, 바로 그 곁에 조선인의 코를 묻은 코무덤(비총)이 자리하고 있다.
1597년 9월 27일, 히데요시는 조선에서 보내온 수만 개의 코를 교토 대불전(大佛殿) 서쪽에 묻으면서 봉분 위에 육중한 오륜석탑을 세웠다. 이튿날인 9월 28일에는 상국사 주지가 주관하고 400여 명의 승려가 참여하는 대규모 공양 의식(시아가키施餓鬼 법회)을 열었다. 겉으로는 비명횡사한 조선인의 원혼을 위로하는 의식이었으나, 실상은 히데요시 자신의 군공과 위엄을 과시하기 위한 정치적 행사였다.
이 코무덤에는 조선인 약 12만 6천 명의 코가 묻혀 있다는 추산이 있으며, 교토 외에도 후쿠오카현 카시이, 오카야마현 비젠시와 쓰야마시, 가고시마 성 부근 등 일본 전역에 코무덤이 산재해 있다. 교토의 코무덤만 해도 최소 3만 8천 개에서 5만 개 이상의 코가 묻혀 있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견해다.
방화·학살 포고문의 실체
남원성 전투 직후인 1597년 9월, 왜군 점령 지역에는 충격적인 포고문이 내걸렸다. 고니시 유키나가 등 왜장의 서명이 선명한 이 포고문의 핵심 내용은 "복종하지 않는 농민은 모두 죽이고 불지르라"는 것이었다. 조선의 관리뿐만 아니라 그 가족까지 모두 죽이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임진왜란 때와는 차원이 다른 잔혹성을 드러낸다.
히데요시 자신도 포고문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매년 군대를 출동시켜 조선 사람들을 전부 죽여 조선을 빈 땅으로 만든 다음, 서쪽 일본인을 옮겨 조선에 살게 하면 10년 후에는 반드시 성공이 있을 것이다." 이는 단순한 군사 작전을 넘어선 민족 말살 계획이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는 "그때 우리나라 사람 중에는 코 없이 살아 있는 자들이 많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왜군이 산 사람에게까지 달려들어 코를 베었다는 것으로, 세계 전쟁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만행이다.
울산성 전투와 전쟁의 종결 — 가해자의 파멸
남원성을 함락시킨 왜군은 북상을 계속하다가 직산에서 명나라 원군과 접전한 뒤, 1597년 9월 중순부터 남하하기 시작했다. 후퇴하면서 지나는 모든 도시를 불태우고, 울산·순천 등지에 새 왜성을 축조했다. 종군 승려 케이넨도 상주·경주를 지나 울산 왜성에 머물렀다.
1597년 12월 22일, 약 4만 7,500명의 조명연합군이 울산성을 공격했다. 가토 기요마사가 불과 40일 만에 쌓은 울산성은 식수와 식량 확보가 취약한 구조였다. 13일간 계속된 포위전 동안 성 안의 왜군은 극심한 기아와 갈증에 시달렸다. 식수를 구하러 성문을 연 왜병 약 1천 명이 매복한 조명연합군에 생포되었다. 남은 왜군은 시체에 고인 물을 마시고, 말고기를 먹었으며, 심지어 인육까지 먹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케이넨의 조선일기에는 울산성 내부의 절망이 적나라하게 담겨 있다. "11월 10일, 어떤 높은 이보다 고통스러울 수 없는 조선의 원정에서 하루빨리 돌아갔으면 하는 듯 기진맥진해 보인다. 아무리 생각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이요. 참으로 원망스럽구나." 할복 자살을 주장하는 장수들까지 나왔다.
| 비교 항목 | 남원성 전투 (1597.8) | 울산성 전투 (1597.12-1598.1) |
|---|---|---|
| 공격 측 | 왜군 5만 6천 | 조명연합군 4만 7,500 |
| 방어 측 | 조명연합군 약 1만 | 왜군 약 1만 |
| 결과 | 방어군 전멸 | 왜군 극심한 피해 후 구원군 도착 |
| 역사적 의의 | 호남 함락의 계기 | 왜군 전쟁 의지 상실의 계기 |
| 기간 | 약 4일 | 약 13일 |
울산성 전투는 왜군에게 심리적 전환점이 되었다. 혹독한 고통을 겪은 왜군은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의지를 상실했고, 이후 강화 협상이 본격화되었다.
조선인 납치와 국제 노예 매매 — 전쟁이 남긴 또 다른 비극
정유재란의 비극은 코베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케이넨의 조선일기 1597년 11월 19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목격담이 적혀 있다.
"일본에서 온갖 상인들이 왔는데 그 중에 인신매매상도 있어서 본진의 뒤를 따라다니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사서는 줄로 목을 묶고 앞으로 몰고 가는데, 잘 걸어가지 못하면 뒤에서 두들겨 패는 모습이 지옥의 사자가 죄인을 잡아들인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정유재란에서는 임진왜란과 달리 비전투원인 농민이 대거 조선에 파견되어 일본 내 노동력이 극심하게 부족해졌다. 이를 보충하기 위해 조선인을 조직적으로 납치했다. 왜군 무사들은 조선인을 잡아 상인에게 팔아 전비를 마련하기도 했다.
일본에 끌려간 피로인(被虜人)의 규모는 한국 학계에서는 약 10만 명, 일본 학계에서는 2만-5만 명으로 추정한다. 이들 중 귀환한 인원은 1만 명 미만으로, 전체의 약 10%에 불과했다.
나가사키 국제 노예 시장
당시 유럽과 교역이 활발했던 나가사키에는 수많은 조선인이 끌려왔다. 포르투갈 상인들이 상관(商館)까지 두고 있던 국제 무역항에서 조선인 포로는 세계 곳곳으로 노예로 팔려나갔다. 조선인 노예가 너무 많이 유입되어 국제 노예 가격이 대폭락했다는 기록까지 남아 있다.
이탈리아 상인은 나가사키에서 조선인 노예 5명을 겨우 12이스쿠두(에스쿠도)에 구매했다는 서양 측 기록이 존재한다. 1598년 나가사키에 머물던 이탈리아 상인 프란체스코 카를레티가 남긴 이 기록은 조선인이 노예로 유럽까지 팔려갔음을 보여주는 1차 사료다. 일부 조선인은 인도와 마카오를 거쳐 멀리 이탈리아까지 보내졌다.
가고시마 조선 도공의 흔적
전쟁이 끝난 뒤 가고시마 지역에는 약 3,700명의 조선인 포로가 억류되어 있었다. 시마즈 요시히로가 퇴각하면서 데려간 조선 도공 80여 명은 가고시마현 히오키시 미야마에 정착하여 도자기 생산을 시작했다. 이 마을에는 조선인 포로들이 세운 단군 사당인 옥산신사(玉山神社)가 지금도 남아 있으며, 당시 끌려온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도자기 기술을 가진 이들은 상대적으로 처우가 나았으나, 기술이 없는 대다수 포로들의 삶은 훨씬 비참했다.
가고시마 미야마 마을에는 현재 200여 호 600여 명이 거주하며, 그 중 약 100호가 조선인 도공의 후손이다. 15대 심수관으로 이어지는 도자기 명가의 시조 심당길(沈當吉)은 정유재란 때 남원에서 끌려온 도공이었다.
만인의총의 현재 — 기억의 복원
만인의총은 1964년 충렬사와 함께 왕봉산 기슭으로 이전되었다. 원래의 합장터는 일제강점기에 전라선 철도와 남원역이 건설되면서 의도적으로 훼손되었다. 일제는 남원성 북문 위에 역사(驛舍)를 세워 조선인 순국 현장을 짓밟히게 했고, 만인의총과 전투 현장이 서로 연결되지 못하도록 차단시켰다.
1981년 사적 제272호로 지정된 만인의총은 충렬사 내에 8충신(정기원·이복남·오응정·김경로·이원춘·신호·박기화·임현)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순의제향을 올리고 있다. 2024년 9월에는 만인의총 역사문화관이 새롭게 개관하여 정유재란 당시의 역사적 사실과 관련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2026년 2월에는 430년 만에 만인의총 본 무덤에 대한 시·발굴 조사가 시작되었다. 만인의총이 처음 조성된 위치와 무덤의 세부 정보를 파악하기 위한 것으로, 인접한 남원읍성 북성벽 복원 정비 사업과 연계되어 추진 중이다.
2024년 개관한 만인의총 역사문화관에 일본군 가문의 문장(紋章)이 전시되어 있다는 논란이 제기되기도 했다. 항일 기념 공간에 일본 측 문양이 배치된 점에 대한 비판이 있었으며, 이는 전시 기획 시 보다 섬세한 역사적 감수성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남원성 전투와 코베기 만행은 단순한 전쟁 일화가 아니다. 일본 측 원문 기록이 증명하는 체계적 학살과 인신매매, 그리고 세계사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코 절단 만행은 전쟁범죄의 원형이다. 만인의총에 잠든 1만여 영혼은 428년이 지난 지금도 목과 코가 없는 시신으로 남아 그날의 참혹을 증언하고 있다.
이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단지 과거를 되돌아보는 행위가 아니다. 전쟁이 민간인에게 어떤 재앙을 가져오는지, 증거 인멸과 명칭 변경으로 역사적 진실이 어떻게 왜곡될 수 있는지를 직시하는 일이다. 남원을 방문한다면 만인의총 역사문화관에 들러 그날의 기록을 직접 확인하고, 교토를 방문한다면 도요쿠니 신사 앞의 코무덤에서 잠시 발길을 멈추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