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 동도 몽돌해변에 가로 60cm, 세로 46cm 크기의 돌 하나가 서 있다. 앞면에는 '독도 獨島 DOKDO KOREA'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한국산악회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대 1952.8. 15'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이 표석은 단순한 돌이 아니다. 광복 직후부터 시작된 대한민국 영토수호의 상징이자, 민간단체가 목숨을 걸고 지켜낸 국토구명의 증거물이다.
이 표석이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에서 '한국 산악회의 레전드 업적'으로 불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일본이 세운 '다케시마(竹島)' 말뚝을 뽑아버리고 그 자리에 '독도'라고 새긴 화강암 표석을 세운 이야기는 195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6.25 전쟁 직후, 해군 함정에 몸을 싣고 일본 순시선의 추격을 뿌리치며 독도에 상륙한 산악회원들의 기록은 영화보다 더 극적이다.
이 글에서는 한국산악회가 독도에 표석을 세우게 된 배경부터 4차례에 걸친 건립과 철거의 우여곡절, 그리고 현재 독도 동도에 서 있는 표석의 의미까지 구체적으로 다룬다.
한국산악회의 탄생과 국토구명사업의 시작
한국산악회의 뿌리는 일제 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31년 일본인들이 조선산악회를 조직하자, 이에 자극받은 한국인 산악인들이 1937년 순수 한국인으로 구성된 '백령회(白嶺會)'를 결성했다. 백령회는 단순한 등산 동호회가 아니라, 민족정신의 상징이었다.
광복 직후인 1945년 9월 15일, 백령회 회원들이 주축이 되어 YMCA 강당에서 조선산악회를 공식 창립했다. 초대 회장에는 민속학자 송석하(宋錫夏), 부회장에는 조선일보 주필 홍종인(洪鍾仁)이 취임했다. 이 단체는 광복과 더불어 진단학회에 이어 두 번째로 설립된 사회단체였으며,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한국산악회로 명칭을 변경했다.
한국산악회의 핵심 활동은 '국토구명사업과 학술조사'였다. 10여 년간 총 11회에 걸쳐 전국의 지형, 동식물, 광물, 지질, 방언 등에 대한 종합적인 학술조사를 시행했다. 1946년 2월 한라산 조사를 시작으로, 오대산과 태백산맥 조사까지 진행하며 귀환보고강연회와 전시회를 열었다.
한국산악회는 단순한 산악 동호회가 아니라 국토조사단체이자 당대 젊은 지성인들이 모인 엘리트 집단이었다. 조선산악회 조사대원 중 12명이 당시 공무원이었고, 과도정부의 공식 위촉을 받아 활동한 민관합동 성격의 조직이었다.
이러한 배경이 독도 학술조사로 이어진 것은 필연적이었다. 광복 이후 일본의 독도 불법 침탈이 계속되던 상황에서, 정부는 외교적 마찰을 우려해 군대 대신 민간단체에 독도 조사를 맡겼다. 정치적으로 비교적 자유로운 한국산악회가 최적의 선택이었다.
3차에 걸친 울릉도 독도 학술조사와 표석 설치의 전말
1차 조사 (1947년 8월 16일 - 28일): 최초의 독도 영토 표지목
1947년 6월 경상북도 최희송 지사가 과도정부 안재홍 민정장관에게 긴급 청원을 보냈다. 독도가 일본인 개인 소유의 섬으로 등록되어 한국 어민의 조업이 금지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과도정부는 '독도에 관한 수색위원회'를 조직하고, 조선산악회에 학술조사를 위촉했다.
송석하 회장이 대장을 맡은 조사단은 사회과학반, 동물반, 식물반, 농림반, 지질반 등 총 65명으로 편성되었다. 1947년 8월 20일 오전 9시 40분, 해안경비대 제공 함정 '대전환'호를 타고 독도 동도에 상륙한 조사대는 독도의 동식물 표본을 채집하고 측량과 사진 촬영을 실시했다. 이때 '朝鮮 慶尙北道 鬱陵島 南面 獨島'라는 표지목(나무 푯말)을 설치했는데, 이것이 광복 이후 독도에 설치된 최초의 한국 영토 표지다.
| 구분 | 1차 조사 (1947년) | 2차 조사 (1952년) | 3차 조사 (1953년) |
|---|---|---|---|
| 기간 | 8월 16일 - 28일 (13일) | 9월 17일 - 28일 (12일) | 10월 11일 - 17일 (7일) |
| 단장 | 송석하 (초대 회장) | 홍종인 (부회장) | 홍종인 (회장) |
| 인원 | 65명 | 38명 (12개반) | 16명 |
| 독도 상륙 | 성공 | 실패 (미군 폭격) | 성공 |
| 주요 성과 | 최초 영토 표지목 설치 | 사진 촬영만 실시 | 화강암 표석 설치, 최초 측량 |
2차 조사 (1952년 9월 17일 - 28일): 미군 폭격으로 좌절된 상륙
1952년, 한국전쟁 와중에도 일본의 독도 침탈은 멈추지 않았다. 6월 25일 일본 수산시험선이 독도에 정박해 1947년에 설치한 한국 표지목을 뽑아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정부는 한일회담에 대비해 한국산악회에 다시 독도 조사를 의뢰했다.
홍종인 부회장을 단장으로 12개반 38명으로 구성된 2차 조사단은 화강암 표석까지 미리 준비해 울릉도에 도착했다. 그런데 독도 인근에서 주일미군 B29 폭격기가 폭격 연습을 하고 있었다. 실제로 1948년 6월에는 미 공군의 폭격 연습으로 독도 해상에서 조업 중이던 한국 어민 14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한 바 있었다. 결국 조사단은 독도 상륙을 포기하고 사진 촬영만 실시한 채 귀환했다.
1952년 9월에만 세 차례에 걸쳐 미 공군 폭격기가 독도 해상에 폭탄을 투하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한국 정부는 1952년 11월 주한미대사관을 통해 폭격 연습 중단을 요구했고, 1953년 3월 미일 합동위원회가 독도를 폭격 연습지에서 제외했다.
3차 조사 (1953년 10월 11일 - 17일): 역사적인 표석 설치
1953년 10월 13일 오전 6시, 22세의 서울대 공대생 김연덕을 비롯한 한국산악회원 16명이 울릉도에서 해군 함정에 올랐다. 문교부, 외교부, 국방부, 상공부의 적극적 후원이 있었고, 독도 측량과 지도 작성에 초점을 맞춘 조사였다.
출발 4시간 후 독도가 보이기 시작했으나, 거센 파도에 소형 배의 뱃머리가 부서져 1차 상륙 시도는 실패했다. 울릉도로 회항하던 중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이 추격해왔다. 한국 해군이 전투태세를 갖추고 일본 영해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자 순시선은 물러섰다.
이틀 후인 10월 15일 오전 1시, 재출항한 조사대는 새벽 6시경 독도 동도 상륙에 성공했다. 이들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島根縣 隱地郡 五箇村 竹島(시마네현 오치군 고카무라 다케시마)'라고 적힌 일본의 나무 말뚝이었다. 1952년 5월 일본 어선이 세운 것이었다.
산악회원들은 이 말뚝을 뽑아버리고, 현대적 측량법을 활용해 독도의 면적과 높이, 둘레를 측량했다. 다음 날인 16일 오후, 이들은 울릉도로 돌아가기 전 가로 60cm, 세로 45cm의 화강암 표석을 동도 몽돌해변 구릉지대에 세웠다. 전면에는 '독도 獨島 LIANCOURT', 후면에는 '한국산악회 울릉도독도학술조사단 Korea Alpine Association 15th AUG 1952'라고 새겼다.
후면의 날짜가 '1952년 8월 15일'로 적힌 이유는 원래 2차 조사(1952년) 때 설치하려다 실패한 표석이기 때문이다. 실제 설치일인 1953년 10월 15일은 나중에 표석 옆면에 추가로 새겨 넣었다. 표석에 'LIANCOURT'를 넣은 것은 당시 국제 해도에서 독도를 '리앙쿠르'로 표기했기 때문에, 국제사회에 이 섬이 바로 한국의 독도임을 알리기 위한 의도였다.
표석의 수난사: 4차례 건립과 철거의 역사
한국산악회 독도 표석의 역사는 건립과 철거가 반복되는 파란만장한 여정이다. 1953년부터 2023년까지 무려 70년에 걸쳐 4차례의 건립이 이루어졌다.
1차 건립 (1953년)과 일본에 의한 철거
1953년 10월 15일 설치된 최초의 표석은 불과 일주일 뒤인 10월 22일,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 '나가라'와 '노시로'에 의해 철거되었다. 일본은 한국산악회의 표석을 뽑아내고 네 번째 일본 영토 표목을 독도에 세웠다.
2차 건립 (2005년)과 LIANCOURT 논란
그로부터 52년이 지난 2005년 8월 15일, 광복 60주년을 맞아 경상북도와 한국산악회가 공동으로 표석을 복원했다. 당시 일본 시마네현이 2월 22일을 '다케시마의 날'로 지정하는 등 도발을 강화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이 표석은 2008년 8월 1일, 예상치 못한 곳에서 또다시 철거당했다. 이번에는 일본이 아니라 경상북도 독도수호대책본부의 결정이었다.
| 구분 | 1차 (1953년) | 2차 (2005년) | 3차 (2015년) | 4차 (2023년) |
|---|---|---|---|---|
| 건립일 | 10월 15일 | 8월 15일 | 8월 9일 | 8월 5일 |
| 재질 | 화강암 | 화강암 (복원) | 조면암 | 조면암 (복원) |
| 전면 문구 | 독도 獨島 LIANCOURT | 독도 獨島 LIANCOURT | 독도 獨島 DOKDO KOREA | 독도 獨島 DOKDO KOREA |
| 철거 원인 | 일본 해상보안청 | LIANCOURT 논란 | 태풍 힌남노 유실 | 현존 |
| 존속 기간 | 약 7일 | 약 3년 | 약 7년 | 현재까지 유지 |
철거 이유는 표석에 새겨진 'LIANCOURT'라는 문구 때문이었다. 2005년 정부가 독도의 공식 영문 표기를 'Dokdo'로 고시한 상황에서, 'LIANCOURT'라는 별도 표기가 영토 개념에 혼란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철거 측의 논리였다. 반면 'LIANCOURT'는 1849년 독도를 발견한 프랑스 포경선 이름으로, 일본의 독도 불법 편입을 반증하는 중요한 역사적 단서라는 반론도 거셌다.
2008년 철거 당시 울릉군은 한국산악회에 아무런 통보도 하지 않고 표석을 철거했다. 한국산악회는 이를 '독단적인 결정'이라고 비판하며 원형 복원을 지속적으로 요구했지만, 이후 7년 동안 표석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3차 건립 (2015년): 광복 70주년의 재건립
한국산악회는 표석 재건립을 위해 문화재청에 지속적으로 현상변경 승인을 요청했다. 독도는 섬 전체가 천연기념물 제336호로 지정되어 있어 시설물 설치에 문화재청 허가가 필수였다. 2013년에는 별도의 시민단체가 표석 복원을 신청했으나, 한국산악회가 '당사자가 아닌 단체의 설치는 부당하다'며 철회를 요청해 무산되기도 했다.
2015년 3월 25일 문화재청 제3차 천연기념물 분과 위원회에서 '조건부 가결'이 내려졌다. 조건은 'LIANCOURT' 대신 'DOKDO KOREA'로 변경하고, 독도의 암석과 동일한 재질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산악회 유학재 이사, 영화감독 박준기, 문화재보수 기능보유자 김동관이 제작을 전담했다. 이들은 울릉도 서면 남양리 비파산 주상절리에서 조면암(粗面巖) 원석을 채취해 최초 표석과 동일한 크기로 제작했다.
광복 70주년이자 한국산악회 창설 70주년인 2015년 8월 9일, 160여 명의 회원과 관계자가 참석한 가운데 독도에서 제막식이 열렸다.
원래 표석은 화강암이었으나 2015년 복원 표석은 조면암으로 제작되었다. 이는 문화재청이 '독도의 암석과 동일한 재질을 사용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기 때문이다. 독도는 화산 활동으로 형성된 섬으로 조면암이 주된 구성 암석이다.
4차 건립 (2023년): 태풍 힌남노 이후의 복원
2022년 9월 6일, 제11호 태풍 힌남노가 독도를 강타했다. 가로 60cm, 세로 46cm의 표석이 무려 30m나 날아가 유실되었다. 울릉군 독도관리사무소 직원이 태풍 이후 확인한 결과 표석은 사라진 상태였다.
한국산악회(회장 변기태)는 2023년 8월 4일부터 6일까지 독도 현장에서 4시간여에 걸쳐 표석을 복원하고 유실된 기존 표석을 수거하는 보수 작업을 완료했다. 같은 해 9월 2일에는 회원 200여 명이 독도에 입도하여 제막식과 함께 독도표석 건립 70주년 기념행사를 개최했다.
독도 표석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와 현재적 가치
한국산악회 독도 표석은 현재 독도에 설치된 영토표석 중 유일하게 민간단체가 건립한 것이다. 나머지 영토표석은 모두 정부 주도로 세워졌다. 이 점에서 한국산악회의 표석은 민간의 자발적 영토수호 의지를 보여주는 독보적인 상징물이다.
국제법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1947년부터 1953년까지의 울릉도 독도 학술조사는 대한민국이 독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를 행사했음을 입증하는 핵심 증거다. 학술 연구에 따르면 이 조사들은 '정부의 공식 또는 민관합동 학술 과학조사'로 간주되며, 민간단체의 조사가 정부의 위촉과 지원 아래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국가의 실효적 지배 의사를 명확히 보여준다.
2023년 동북아역사재단은 한국산악회와 업무협약을 맺고 과거 산악회 활동이 담긴 자료를 기증받았다. 1947년 울릉도 독도 학술조사 관련 문서가 처음으로 공개되었고, 동북아역사재단 독도체험관에서는 '1947, 울릉도 독도 학술조사를 가다'라는 기획전시가 열렸다.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에서 이 표석의 이야기가 '산악회 레전드'로 회자되는 이유는 명확하다. 6.25 전쟁 직후라는 극한의 상황에서, 일본 순시선의 추격을 뿌리치며 독도에 상륙하고, 일본이 박아둔 다케시마 말뚝을 뽑아버린 뒤 한국 영토임을 선언하는 표석을 세운 행위는 행동으로 보여준 애국의 전형이다. 특히 당시 산악회원들이 무거운 화강암 표석을 거친 파도를 넘어 독도까지 운반했다는 사실은 놀라움을 자아낸다.
독도 동도 몽돌해변에 서 있는 한국산악회의 표석은 70년의 세월을 거치며 일본의 철거, 명칭 논란에 따른 자진 철거, 태풍에 의한 유실이라는 수난을 반복해왔다. 그러나 그때마다 다시 세워졌다. 이 반복적인 재건립 자체가 대한민국 국민의 독도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영토 의식을 증명한다.
한국산악회의 독도 표석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의 영토수호 행위다. 독도에 관심이 있다면 동북아역사재단 독도체험관을 방문하거나, 한국산악회가 제작한 독도 표석 건립 영상(1945 - 2023)을 확인해보길 권한다. 표석 하나에 담긴 70년의 이야기가 독도의 가치를 새롭게 느끼게 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