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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사건, 빼앗긴 이름과 역사의 진실 | 78년의 침묵을 깨다 | EasyTip
지식·교양

제주 4·3 사건, 빼앗긴 이름과 역사의 진실 | 78년의 침묵을 깨다

2026년 3월 25일 06:08·20 views·9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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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제주 4·3의 본질: 국가 폭력이 빚은 대학살 2 빼앗긴 이름들: 학살 이후에도 계속된 폭력 3 학살 책임자는 훈장, 피해자는 낙인: 뒤틀린 역사의 현주소
4 기억의 회복: 영화, 유네스코, 그리고 이름 되찾기 5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 6 자주 묻는 질문

78년 전 제주도에서 수만 명의 민간인이 국가 권력에 의해 학살당했다. 죽은 자의 이름은 지워졌고, 살아남은 자는 자신의 이름조차 지킬 수 없었다. '빨갱이'라는 낙인 아래 가족의 뿌리가 통째로 뒤틀렸고, 그 고통은 세대를 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2026년 3월 22일 방영된 MBC 탐사기획 스트레이트 334회는 '4·3과 빼앗긴 이름'이라는 제목으로 이 비극의 현재를 조명했다. 이름을 잃어버린 유족들의 증언, 학살 책임자가 국가유공자로 둔갑한 모순, 그리고 77년 만에 겨우 시작된 가족관계 정정의 현장이 담겼다.

이 글은 해당 보도와 다수의 팩트 검증을 기반으로, 제주 4·3의 핵심 쟁점을 정리한다. 역사를 기억하는 일이 왜 지금 이 순간에도 절실한지, 그 이유를 구체적 사실로 짚어본다.

핵심 정보내용
사건 기간1947년 3월 1일 - 1954년 9월 21일 (7년 7개월)
추정 희생자 수2만 5천 - 3만 명
토벌대 의한 사망 비율78.7%
공식 확정 희생자약 1만 5천 명 (2025년 기준)
국가기념일 지정2014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2025년 4월 등재
가족관계 정정 접수약 500건 (첫 정정 2026년 2월)
1

제주 4·3의 본질: 국가 폭력이 빚은 대학살

제주 4·3 사건의 시작점은 1947년 3월 1일이다. 3·1절 기념 제주도대회에서 기마경찰의 말에 어린아이가 치이는 사고가 발생했고, 이에 항의하는 군중을 향해 경찰이 발포해 민간인 6명이 숨졌다. 이 사건에 대한 항의로 제주도민의 95%가 참여하는 총파업이 벌어졌고, 미군정은 제주를 '레드 아일랜드(붉은 섬)'로 규정하며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한라산 중허리 오름마다 봉화가 타올랐다. 남로당 제주도당 소속 350명의 무장대가 12개 경찰지서와 우익단체를 습격하며 무장봉기를 선언했다.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가 명분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후에 벌어진 일이다.

정부는 1948년 11월 17일 계엄령을 선포하고 '중산간 지역 초토화 작전'을 실시했다. 해안선에서 5km 이상 떨어진 중산간 마을은 적성 지역으로 간주됐고, 그곳에 남아 있는 주민은 무조건 '폭도'로 취급됐다. 그 결과 중산간 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다. 소개령을 전달받지 못해 마을에 남은 노인, 여성, 어린이까지 무차별적으로 살해됐다.

💡 TIP

제주 4·3은 단순한 '좌우 충돌'이 아니다. 정부 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희생자의 78.7%가 토벌대(군·경)에 의해 사망했고, 남로당 무장대에 의한 희생은 15.7%였다. 나머지는 가해 주체를 특정할 수 없는 사례다. 피해자 다수가 비무장 민간인이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의 본질은 국가 폭력에 의한 민간인 대학살이다.

군·경찰뿐 아니라 극우 단체인 서북청년단(서청)도 학살에 가담했다. 이북 출신 청년들로 구성된 서청은 제주 사정을 전혀 모른 채 '빨갱이 소탕'이라는 명분으로 도민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4·3 발발 이전에도 약 760명의 서청 단원이 제주에 들어와 경찰과 합세해 주민을 탄압한 것으로 추산된다.

⚠️ 주의

제주 4·3을 여전히 '공산 폭동'이라고 규정하는 시각이 일부 존재한다. 그러나 2003년 정부가 확정한 진상조사보고서와 2025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가 증명하듯, 이 사건의 핵심은 국가 권력에 의한 무고한 민간인 학살이다. 사건의 성격을 왜곡하는 것은 희생자에 대한 2차 가해에 해당한다.

2

빼앗긴 이름들: 학살 이후에도 계속된 폭력

4·3의 비극은 학살로 끝나지 않았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과 가족의 뿌리마저 지키지 못했다. '빨갱이'라는 낙인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2.1

이름을 잃은 사람들의 증언

4·3 당시 열다섯 소년이었던 김명원 씨(93세)의 사례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아버지는 진압군의 총탄에 숨졌고, 어머니는 보름 남짓 된 막내를 품에서 억지로 빼앗긴 뒤 총살당했다. 태어난 지 보름밖에 안 된 막내도 얼마 못 가 세상을 떠났다.

홀로 남은 김 씨는 어린 여동생을 다른 집에 맡겨야 했는데, 그 과정에서 여동생이 다른 집의 호적에 올라가며 성(姓)이 바뀌었다. 남매가 법적으로 남남이 되어버린 것이다. 김 씨는 여동생을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을 평생 짊어졌다.

피해 유형구체적 사례결과
호적 말소학살 후 사망 신고 불가법적 존재 자체가 삭제
성(姓) 변경다른 가정에 입양 시 호적 이전혈연관계 단절
가상 인물 호적사망한 남편 대신 허구의 인물 등재평생 가짜 이름으로 생활
출생 기록 왜곡친부 미등재, 다른 사람 아래 등재진짜 아버지 이름 상실

또 다른 사례도 있다. 4·3 당시 진압군에게 남편을 잃고 총상까지 입은 채 임신 중이었던 한 여성은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아이가 태어나자 시아버지는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호적에 올리고, 며느리와 혼인 신고를 했다. 그 결과 손녀는 친아버지가 아닌 존재하지도 않았던 허구의 인물의 딸로 평생을 살아야 했다.

이러한 사연이 단지 몇 건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가족관계 정정을 신청한 건수만 약 500건에 달한다.

💡 TIP

4·3 유족이 이름과 가족관계를 되찾는 것은 단순한 행정 절차가 아니다. 그것은 국가 폭력으로 파괴된 정체성을 회복하는 작업이고, 억울하게 죽은 가족이 이 세상에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일이다. 김명원 할아버지의 표현대로, "호적이 만들어짐으로 해서 이런 사람이 이 세상에 왔다 갔다는 기록이 남는 것"이다.

2.2

강요된 침묵의 역사

가족관계를 바로잡는 시도조차 오랫동안 불가능했다. 1978년, 4·3의 실상을 다룬 최초의 대중적 소설 『순이삼촌』을 발표한 현기영 작가는 중앙정보부(남산)에 끌려가 2박 3일 동안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소설은 금서가 됐다. 이 작품의 배경인 북촌리 너븐숭이에서는 1949년 1월 17일 하루에만 수백 명의 주민이 집단 학살됐다. 4·3 당시 단일 사건으로는 최대 규모의 민간인 학살이었다.

이처럼 4·3을 입에 올리는 것 자체가 목숨을 건 행위였던 시절이 수십 년간 이어졌다. 제주 공동체는 물질적으로만 파괴된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영혼 자체가 파괴된 상황이었다.

⚠️ 주의

4·3 가족관계등록부 정정 신청 기한은 2026년 8월 31일까지다. 신청자 대부분이 80-90대 고령이므로 시간이 촉박하다. 해당되는 유족은 제주도 4·3지원과 또는 4·3 종합정보시스템을 통해 빠르게 절차를 확인해야 한다.

3

학살 책임자는 훈장, 피해자는 낙인: 뒤틀린 역사의 현주소

4·3의 가장 충격적인 모순 중 하나는 민간인 학살을 주도한 진압 책임자들이 처벌은커녕 훈장과 국가적 예우를 받아왔다는 점이다.

3.1

박진경 대령: '30만 도민 희생시켜도 무방하다'

미군정이 '레드 아일랜드' 진압 책임자로 내려보낸 박진경 중령은 1948년 5월 조선경비대 9연대장으로 부임했다. 그는 부임 직후 "조선 민족 전체를 위해서는 30만 도민을 희생시켜도 좋다"고 공언했고, "도피하는 자는 3회 정지 명령 후 총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무차별 토벌 작전을 주도한 공로로 부임 한 달 만에 대령으로 초고속 진급했다. 그러나 강경 진압에 반대한 부하 군인들에 의해 1948년 6월 18일 암살당했다. 그런데 이 인물에 대한 국가의 예우는 이해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박진경 대령 관련 주요 사실내용
사망 시점1948년 6월 18일
이승만 정부 조치을지무공훈장 수여
안장 장소국립서울현충원
추도비제주도 소재
동상경남 남해 소재
2025년 논란국가유공자 등록 승인

2025년 10월, 보훈부는 박 대령을 국가유공자로 등록 승인했다. 과거 무공훈장을 받은 기록이 있으면 후손 신청 시 자동 등록되는 절차를 따른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도 치명적인 모순이 있다.

국가기록원 문서를 확인하면, 박 대령의 무공훈장은 '6·25 을지무공훈장'으로 기록돼 있다. 1948년에 사망한 사람이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의 참전 유공자로 분류된 것이다. 국방부는 '참전유공자법상 6·25의 범주를 1948년 8월 15일 이후부터 간주한다'고 해명했지만, 박 대령의 사망 시점(1948년 6월)은 이 기준보다도 두 달이 빠르다. 어떤 논리로도 설명이 되지 않는다.

유족들의 거센 반발 이후 이재명 대통령이 재검토를 지시했고, 보훈부는 2026년 2월 등록을 원점에서 재검토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보훈부 장관은 훈장 자체의 취소에 대해서는 "3만 명에 달하는 수훈자 전체를 재심사해야 하므로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 TIP

박진경 대령의 추도비 옆에는 2025년 12월, 제주도가 역사적 사실을 담은 안내판을 새로 설치했다. 박 대령의 부하들이 재판 과정에서 증언한 '양민 학살 명령' 내용이 기재됐다. 진압 책임자를 찬양하는 기념물 옆에 그의 만행을 기록한 안내판이 병존하는 기묘한 상황이다.

3.2

함병선 대령: '한라산이 무너져도 장군을 기념하리로다'

1948년 계엄령 선포 이후 제주에 투입된 조선경비대 2연대장 함병선 대령은 더 본격적인 학살을 이끈 인물이다. 소설 『순이삼촌』의 모델이 된 북촌리 너븐숭이 학살이 바로 함병선의 2연대 소행이었다. 동네 주민 수백 명을 초등학교에 몰아놓고 자행한 대학살이다.

그런데 이 인물의 이름은 제주도에 세워진 공적비에 이렇게 새겨져 있다.

"한라산이 비록 높으나 장군의 공적보단 낮고, 남해가 비록 깊으나 장군의 혜택보다는 얕도다. 한라산이 무너지고 남해가 마르도록 장군을 기념하리로다."

수백 명의 양민을 학살한 자를 '한라산보다 높은 공적'의 소유자로 찬양하는 비문이 공적비에 버젓이 새겨져 있었다. 2026년 3월, 제주도는 이 공적비를 마침내 철거하고 4·3 평화공원으로 이설하기로 했다.

비교 항목학살 피해자진압 책임자
사회적 대우'빨갱이' 낙인, 이름 말소훈장, 현충원 안장, 공적비 건립
법적 지위2000년대까지 피해자 인정 불가사후에도 국가유공자 등록
기록수십 년간 사건 자체 은폐교과서·공식 기록에 공적 기재
기념물없음 (최근에야 추모 공간 조성)추도비, 동상, 공적비 건립
진상 규명78년째 진행 중책임 소재 미규명
4

기억의 회복: 영화, 유네스코, 그리고 이름 되찾기

오랜 침묵이 깨지기 시작한 것은 2000년 4·3 특별법 제정 이후부터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과거 국가 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제주도민에게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밝히며,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공식 사과했다. 2014년에는 4·3 희생자 추념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됐고, 2025년 4월에는 4·3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4.1

영화 '내 이름은': 베를린을 울린 제주의 이야기

정지영 감독이 연출하고 염혜란, 유준상이 출연한 영화 '내 이름은'은 4·3의 상처를 '이름 찾기'라는 화두로 풀어낸 작품이다. 자신의 '촌스러운' 이름을 바꾸고 싶은 10대 아들 영옥과, 절대 그 이름을 버릴 수 없는 엄마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1949년 제주의 기억이 점차 드러난다.

2026년 2월 제76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포럼 부문에 공식 초청된 이 영화는 상영 직후 기립박수를 받았다. "비극적 역사가 남긴 트라우마를 세대를 넘어 섬세하게 비추고 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울림을 줬다"는 평가가 쏟아졌다. 국내 개봉은 2026년 4월 15일로 확정됐다.

유준상 배우는 MBC 스트레이트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며칠 동안 4·3 관련 장소를 다 찾아다녔고, 추모를 하고 싶었다. 끊임없이 기억해 준다는 것, 그게 제일 중요한 것 같다."

💡 TIP

4·3을 다룬 문화 작품은 점차 늘고 있다.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1978), 오멸 감독의 영화 『지슬』(2012), 그리고 정지영 감독의 '내 이름은'(2026)까지, 문학과 영화가 역사의 기억을 이어가는 중요한 매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작품들을 통해 4·3을 처음 접하는 사람이 더 깊이 역사를 찾아가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다.

4.2

77년 만의 첫 가족관계 정정

2023년 4·3 특별법 개정으로 소송 없이도 정부 조사를 통해 가족관계등록부를 정정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러나 진척은 더뎠다. 약 500건의 신청이 접수됐지만, 2026년 2월 13일 4·3위원회 제37차 회의에서 비로소 4명의 가족관계가 처음으로 공식 정정됐다. 77년 만의 일이었다.

정정 대상자 중 한 명인 고계순 씨(77세)는 4·3으로 아버지가 숨진 뒤 작은 아버지의 호적에 올라 평생을 살아왔다. 그는 아버지를 되찾은 소감을 이렇게 전했다. "내가 이렇게 귀머거리에 말 못 따라 먹어도, 할 일은 다 했으니까. 사랑해요."

2026년 3월에는 제주특별자치도가 4·3으로 인한 가족관계 불일치 전수조사에 착수했다. 신청 기한이 2026년 8월 31일까지이므로, 고령의 유족들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5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

"죽은 사람은 수두룩한데 죽인 사람은 없다." 4·3 유족들이 반복하는 이 한마디가 78년간의 모순을 압축한다.

최소 2만 5천 명에서 3만 명이 학살당했지만, 학살 명령을 내린 자는 단 한 명도 처벌받지 않았다. 오히려 훈장을 받고, 현충원에 묻히고, 공적비에 이름이 새겨졌다. 반면 살아남은 피해자들은 자신의 이름도, 가족의 이름도 지키지 못한 채 수십 년을 침묵 속에 보내야 했다.

4·3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지만, 국민 상당수는 여전히 4·3의 실체를 정확히 모른다. '이름만 들어봤다', '그런 사건이 있었다더라' 수준의 인식이 대부분이다. 일부에서는 지금도 4·3을 '공산 폭동'으로 매도하며 유족들을 조롱한다.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과거에 대한 집착이 아니다. 국가 폭력의 책임 소재를 명확히 밝히고, 피해자의 이름과 명예를 회복하며,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미래를 위한 작업이다. 2026년 4·3 78주년을 맞아, 추가진상조사보고서 심의가 재개되고, 함병선 공적비가 철거되고, 가족관계 전수조사가 시작됐다. 느리지만 분명히 움직이고 있다.

그 움직임이 계속되려면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관심이 필요하다. 4월 15일 개봉하는 영화 '내 이름은'을 보는 것도 하나의 시작이 될 수 있다. 4·3 평화공원을 방문하는 것도, 유족들의 증언에 귀 기울이는 것도 기억의 방법이다. 끊임없이 기억해 준다는 것, 유준상 배우의 말대로 그것이 제일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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