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24일, 서울회생법원 회생15부는 온라인 명품 플랫폼 발란에 대해 파산을 선고했다. 2015년 설립 이후 10년, 기업가치 3000억 원을 인정받으며 유니콘 기업의 꿈을 키우던 1세대 명품 플랫폼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코로나19 시기 거래액 6800억 원, 시장 점유율 45%로 업계 정상에 올랐던 발란이 왜 회생조차 실패하고 파산에 이르렀을까. 그 배경에는 과도한 마케팅비 지출, 수익 모델의 구조적 한계, 엔데믹 이후 급변한 소비 트렌드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이 글에서는 발란이라는 기업의 탄생과 성장, 위기의 시작, 그리고 파산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재무 데이터와 함께 분석한다. 스타트업 생태계와 이커머스 업계 종사자라면 반드시 짚어봐야 할 사례다.
발란은 어떤 기업이었나 - 창업부터 업계 1위까지
발란(BALAAN)은 2015년 5월 최형록 대표가 설립한 온라인 명품 유통 플랫폼이다. 최 대표는 공군 회계장교 전역 후 유럽 현지 명품 편집숍을 방문하는 과정에서 사업 아이디어를 얻었다. 오프라인 편집숍에서 판매하는 명품을 온라인으로 옮겨오면 가격 경쟁력과 접근성 모두 확보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발란의 비즈니스 모델은 오픈마켓 기반의 중개 플랫폼이었다. 해외 현지 명품 도매업자와 국내 셀러(판매자)가 발란 플랫폼에 입점해 상품을 등록하면, 소비자가 이를 구매하고 발란은 중개 수수료를 받는 구조였다. 1000개 이상의 브랜드, 5만 개 이상의 제품을 확보하며 국내 최대 규모의 명품 상품 구색을 갖춰나갔다.
2017년 베타 서비스를 출시한 후 스파크랩, 미래에셋벤처투자 등으로부터 초기 투자를 유치했다. 이후 시리즈A에서 메가인베스트먼트, SBI인베스트먼트, 위벤처스, 큐캐피탈파트너스, 코오롱인베스트먼트 등으로부터 100억 원 규모의 투자를 받았다. 시리즈B에서는 기업가치 2500억 원을, 2022년 시리즈C에서는 기업가치 3000억 원을 인정받으며 총 누적 투자 유치 금액 735억 원을 달성했다. 전략적 투자자로는 네이버가 참여했고, 재무적 투자자로는 미래에셋벤처투자, SBI인베스트먼트, JB자산운용, 신한캐피탈, 컴퍼니케이파트너스 등이 이름을 올렸다.
발란의 핵심 타깃 고객은 35 - 54세의 고소득·고소비 계층이었다. 백화점 명품 매장을 이용하던 고객을 온라인으로 끌어오겠다는 전략이 초기에는 매우 효과적으로 작동했다.
코로나 특수와 폭발적 성장 - 거래액 6800억의 정점
발란의 성장 곡선은 코로나19 팬데믹과 궤를 같이한다. 해외여행이 제한되고 보복 소비 심리가 확산되면서, 소비자들은 온라인으로 명품을 구매하기 시작했다. 발란의 거래액 추이를 보면 그 폭발적 성장세가 한눈에 드러난다.
| 연도 | 거래액 | 전년 대비 성장률 |
|---|---|---|
| 2018년 | 36억 원 | - |
| 2019년 | 257억 원 | 약 614% |
| 2020년 | 533억 원 | 약 107% |
| 2021년 | 3150억 원 | 약 491% |
| 2022년 | 6800억 원 | 약 116% |
| 2023년 | 약 4000억 원 | 약 -41% |
2021년에는 월 거래액 572억 원, 월간 활성 사용자 수(MAU) 600만 명, 월 신규 앱 다운로드 40만 건을 기록하며 리테일 서비스 앱 중 가장 빠른 성장세를 보였다. 2022년에는 거래액 6800억 원으로 정점을 찍으며 국내 온라인 명품 시장 점유율 45%를 차지했다. 한때 기업가치가 8000억 원까지 거론되며, 명품 이커머스 업계 최초의 유니콘(기업가치 1조 원 이상) 기업이 될 수 있다는 기대를 모으기도 했다.
이 시기 발란은 배우 김혜수를 광고 모델로 기용하며 대대적인 TV 광고 캠페인을 펼쳤다. 김혜수를 앞세운 광고 온에어 이후 2021년 10월 한 달 거래액은 461억 원을 기록했고, MAU는 전월 대비 48% 증가한 517만 명에 달했다. 발란이라는 브랜드의 대중적 인지도가 급격히 상승한 시기였다.
거래액과 매출은 전혀 다른 지표다. 거래액 6800억 원은 플랫폼을 통해 거래된 총 금액이고, 발란이 실제로 수취한 매출(수수료)은 2022년 기준 891억 원에 불과했다. 명품 플랫폼의 평균 수익률(수수료율)이 10% 안팎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몰락의 시작 - 과도한 마케팅과 수익성 악화
발란의 위기는 성장의 이면에서 이미 자라나고 있었다.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과도한 마케팅비 지출이었다. 머스트잇, 트렌비 등 경쟁 플랫폼과의 출혈 경쟁 속에서 발란은 공격적인 광고 집행을 선택했다.
| 연도 | 광고선전비 | 영업손실 | 매출 |
|---|---|---|---|
| 2020년 | - | -64억 원 | - |
| 2021년 | 약 190억 원 | -186억 원 | - |
| 2022년 | 약 385억 원 | -374억 원 | 891억 원 |
| 2023년 | 대폭 축소 | -99억 원 | 392억 원 |
2022년 광고선전비만 385억 원을 지출했다. 전년 대비 2배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판매비와 관리비는 725억 원에 이르러, 매출 891억 원의 대부분을 운영 비용으로 소진하는 구조가 고착됐다. 2020년부터 2023년까지 4년간 누적 영업손실은 724억 원에 달했다.
여기에 코로나19 엔데믹(감염병의 풍토병화) 전환이 결정타였다. 해외여행이 재개되자 오프라인 명품 매장으로 고객이 되돌아갔다. 2023년 발란의 매출은 전년 891억 원에서 392억 원으로 56% 급감했다. 거래액 역시 6800억 원에서 약 4000억 원 수준으로 하락했다.
발란은 정산 지연 사태 직전까지도 20 - 30% 할인 쿠폰을 대량으로 배포하는 전략을 유지했다. 이는 단기적으로 거래액을 끌어올리는 효과가 있었지만, 장기적으로는 마진을 갉아먹고 적자를 키우는 독이 됐다.
발란은 2024년 초 김혜수 모델 계약을 종료하고, 직원을 절반으로 줄이는 구조조정을 단행하며 비용 절감에 나섰다. 그 결과 2023년 4분기에 창사 이래 최초로 분기 흑자를 기록했다. 하지만 이미 2023년 감사보고서 기준 자본총계가 마이너스 77억 원으로 완전자본잠식 상태였다. 감사인은 "계속기업가치 불확실"이라는 의견을 냈다.
완전자본잠식이란 누적 적자가 자본금을 모두 잠식한 상태를 뜻한다. 이 상태에서는 외부 투자 유치나 신규 대출이 극히 어려워진다. 발란의 경우 실질적으로 회사가 가진 순자산이 마이너스라는 의미였다.
실리콘투 투자와 정산 지연 - 유동성 위기의 폭발
위기 속에서 발란은 2025년 2월 화장품 유통 기업 실리콘투로부터 150억 원 규모의 전환사채(CB) 투자를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실리콘투는 발란의 경영권 확보를 조건으로 투자에 나섰다. 하지만 이 투자에는 치명적인 조건이 붙어 있었다. 직전 2개월 연속 직매입 매출 비중 50% 이상, 2개월 연속 월 영업이익 흑자 등 경영 성과 조건을 충족해야 2차 투자금 75억 원이 집행되는 구조였다.
실리콘투가 책정한 발란의 기업가치는 약 290억 원에 불과했다. 2022년 시리즈C 투자 당시 3000억 원의 10분의 1 수준으로 쪼그라든 것이다. 발란은 1차 투자금 75억 원만 확보한 상태에서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고, 나머지 75억 원은 집행되지 않았다.
자금난이 극에 달한 2025년 3월 24일, 발란은 입점 파트너사에 대한 판매대금 정산을 중단했다. 업계에서 추정한 미정산 금액은 약 130억 원이었다. 발란에는 약 1300개 업체가 입점해 있었고, 월평균 거래액은 약 300억 원 규모였다. 최형록 대표는 "정산 오류"라고 해명했지만, 3월 28일 결제 서비스가 전면 중단되면서 사실상 영업이 멈춰버렸다.
3월 31일, 발란은 서울회생법원에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최 대표는 "추가 자금 확보가 지연돼 단기적인 유동성 경색에 빠졌다"고 밝혔다. 이 사태는 2024년 티몬·위메프(티메프)의 1조 3000억 원 규모 정산 지연 사태와 유사한 패턴을 보여 "제2의 티메프"라는 우려가 확산됐다.
발란의 누적 투자 유치 금액은 실리콘투 투자분을 포함해 약 885억 원 이상이었다. 하지만 이 중 상당 부분이 마케팅비와 운영 적자를 메우는 데 사용됐고, 수익 모델의 근본적 개선에는 투입되지 못했다.
회생 실패와 파산 선고 - 11개월간의 마지막 싸움
기업회생절차가 개시된 후 발란은 회생계획안을 법원에 제출했다. 초기 인수가격은 22억 원이었으며, 이후 변제 재원을 57억 원까지 늘리는 수정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채권자들의 신뢰를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2026년 2월 5일 열린 관계인집회에서 발란의 회생계획안 동의율은 약 35%에 머물렀다. 법원 인가 요건인 의결권 총액의 3분의 2(66.7%) 이상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수치였다. 결정적으로 일반회생채권의 55.5%를 보유한 최대 채권자 실리콘투가 반대표를 던졌다.
| 회생 절차 주요 일정 | 내용 |
|---|---|
| 2025년 3월 31일 | 기업회생절차 신청 |
| 2026년 2월 5일 | 관계인집회 회생계획안 부결 (동의율 35%) |
| 2026년 2월 6일 | 회생절차 폐지 결정 |
| 2026년 2월 9일 | 법원 강제인가 불허 |
| 2026년 2월 24일 | 파산 선고 |
| 2026년 4월 3일 | 채권 신고 마감 |
| 2026년 4월 16일 | 채권자 집회 및 채권 조사 예정 |
발란 측은 법원의 강제인가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강제인가란 회생계획안이 부결되더라도 회생 변제액이 파산 시 배당액보다 크다고 판단될 경우 법원이 직권으로 인가하는 제도다. 하지만 2월 9일 서울회생법원은 강제인가를 불허했다. 법원은 발란의 회생을 통한 변제액이 파산 시 배당액보다 유리하다고 볼 근거가 부족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같은 날 법원은 회생절차 폐지를 결정했고, 2월 24일 최종적으로 파산을 선고했다. 회생 신청 11개월 만의 결말이었다.
파산 선고와 함께 발란의 모든 자산은 청산 절차에 들어간다. 1200여 입점사의 미정산 채권, 투자자들의 투자금 회수 모두 파산 배당 절차를 통해 이뤄지게 된다. 기존 투자자들이 투입한 약 735억 원(실리콘투 투자분 제외)은 사실상 전액 손실 처리가 불가피하다.
발란 파산이 남긴 교훈 - 이커머스 생태계에 던지는 질문
발란의 파산은 단순히 한 기업의 실패에 그치지 않는다. 코로나 시기 급팽창했던 온라인 명품 시장이 엔데믹 이후 어떻게 재편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 사례다. 동시에 스타트업 생태계 전반에 여러 가지 구조적 질문을 던진다.
첫째, 수익 모델 없는 외형 성장의 한계가 드러났다. 발란은 중개 수수료 외에 별다른 수익원이 없었다. 평균 수익률 10% 안팎의 구조에서 수백억 원 규모의 마케팅비를 감당하는 것은 처음부터 지속 불가능한 전략이었다. 경쟁사인 트렌비가 중고 명품 거래로 사업 모델을 전환하고, 머스트잇이 사옥 매각과 구조조정을 통해 생존을 모색한 것과 달리, 발란은 투자 유치에만 의존하며 근본적인 변화를 외면했다.
둘째, 과도한 마케팅 집중의 위험성이다. 2022년 385억 원의 광고비는 같은 해 매출 891억 원의 43%에 달하는 비정상적 수준이었다. 고객 획득 비용(CAC)이 고객 생애 가치(LTV)를 초과하는 상태가 지속됐고, 이는 쿠폰 남발로 이어져 브랜드 가치마저 훼손시켰다.
셋째, 이커머스 플랫폼의 정산 리스크가 재확인됐다. 티메프 사태에 이어 발란까지, 플랫폼이 유동성 위기에 빠지면 입점 판매자가 가장 먼저 피해를 보는 구조적 취약점이 또다시 노출된 것이다.
발란의 10년은 한국 이커머스 역사에서 잊혀지지 않을 사례로 남게 됐다. 기업가치 3000억 원에서 파산까지, 불과 4년이 걸리지 않았다. 스타트업을 운영하거나 투자하는 이들이라면 이 사례에서 성장과 수익성 사이의 균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번 되새겨야 한다. 지금 당장 자사의 유닛 이코노믹스(단위 경제학)를 점검하고, 외부 자금에 의존하지 않는 지속 가능한 수익 구조를 구축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다음 행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