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을 켜고, 게임 콘솔을 부팅하고, AI에게 질문을 던지는 모든 순간 뒤에는 단 한 회사의 기계가 숨어 있다. 그 기계 한 대 가격이 무려 3억8천만 달러, 한화로 약 5천억 원에 달한다. 비행기 두 대 무게에 부품 10만 개, 케이블만 2km가 들어가는 이 장비의 이름은 EUV 노광장비, 만드는 회사는 네덜란드의 ASML이다.
더 주목할 점은 이 기술을 만들 수 있는 회사가 지구상에 단 하나뿐이라는 사실이다. 삼성, TSMC, 인텔 같은 세계 최정상 반도체 기업들이 줄을 서서 ASML의 기계를 기다린다. 돈을 더 준다고 빨리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반도체 시장의 진짜 핵심 권력은 칩을 만드는 회사가 아니라 칩 만드는 기계를 만드는 이 회사에 있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이 글은 5천억 원짜리 EUV 장비가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 왜 이렇게 비싸고 전기를 많이 먹는지, 그리고 작은 합작 벤처로 시작한 ASML이 어떻게 거인이 됐는지 그 본질을 정리한다.
ASML EUV 장비 가격과 핵심 스펙 한눈에 정리
EUV(Extreme Ultraviolet, 극자외선) 노광장비는 반도체 미세공정의 심장이다. 빛으로 실리콘 웨이퍼 위에 나노미터 단위 회로 패턴을 인쇄하는 장비인데, 파장이 짧을수록 더 미세한 회로를 그릴 수 있다. EUV는 13.5나노미터(nm)라는 극도로 짧은 파장을 사용해 7nm 이하 첨단 칩 제조를 가능하게 만든다.
현재 ASML이 판매하는 EUV 장비는 크게 두 종류다. 기존 0.33 NA(개구수) 방식의 표준 EUV와, 차세대 0.55 NA 방식의 High-NA EUV다. 표준 EUV는 대당 약 2억2천만 달러에서 시작하고, 최신 High-NA EUV는 약 3억8천만 달러에 이른다. 흔히 언급되는 5천억 원짜리 기계가 바로 이 High-NA 모델이다.
EUV보다 한 세대 아래인 DUV(심자외선) 장비는 500만 달러에서 9천만 달러 수준이다. EUV 한 대 값이면 DUV를 수십 대 살 수 있는 셈이라 가격 격차가 압도적이다.
| 구분 | 표준 EUV (0.33 NA) | High-NA EUV (0.55 NA) | DUV (비교용) |
|---|---|---|---|
| 대표 모델 | TWINSCAN NXE:3800E | TWINSCAN EXE 시리즈 | 이머전 DUV |
| 대당 가격 | 약 2억2천만 달러 | 약 3억8천만 달러 | 500만 - 9천만 달러 |
| 파장 | 13.5nm | 13.5nm | 193nm |
| 시간당 처리량 | 약 220-230장 | (R&D 단계) | - |
| 무게 | 약 180톤급 | 약 165-180톤 | 상대적으로 가벼움 |
| 주요 용도 | 2nm급 첨단 로직·메모리 | 차세대 미세공정 | 성숙 공정 |
EUV와 High-NA의 가장 큰 차이는 개구수(NA)다. NA가 0.33에서 0.55로 커지면 더 큰 각도의 빛을 웨이퍼에 모을 수 있어 해상도가 높아진다. 같은 면적에 더 촘촘하게 회로를 그릴 수 있다는 뜻인데, 그만큼 가격은 두 배 가까이 뛴다.
인공태양을 가둔 기계 - EUV 빛은 어떻게 만들어지나
섭씨 수십만 도의 플라즈마를 생성하고 거기서 EUV 빛을 추출한다는 설명은 정확하다. 다만 그 과정은 상상 이상으로 극단적이다.
EUV 장비 안에서는 진공 챔버 속으로 머리카락보다 작은 주석(Tin) 액체 방울이 시속 240km 안팎의 속도로 날아간다. 여기에 강력한 CO2 레이저가 두 번 연속 펄스를 쏜다. 첫 번째 펄스는 방울을 납작한 팬케이크 모양으로 펴고, 두 번째 펄스가 이를 순간적으로 증발시켜 플라즈마로 만든다. 이때 플라즈마 온도는 약 22만 도(℃)에 달하는데, 이는 태양 표면 온도의 약 40배에 해당한다. 기계 안에서 인공 별을 켰다 끄는 셈이다.
이 폭발이 1초에 무려 5만 번 일어난다. 각 폭발에서 13.5nm 파장의 극자외선이 나오고, 정교한 거울들이 이 빛을 모아 웨이퍼로 보낸다. 한 대의 장비가 가동 중에 거의 1조 개에 가까운 주석 방울 폭발을 만들어낸다는 계산이 나온다.
빛을 반사시키는 인류 최고 정밀도의 거울
EUV 빛은 거의 모든 물질에 흡수되기 때문에 일반 렌즈를 통과하지 못한다. 그래서 EUV 장비는 렌즈 대신 독일 자이스(ZEISS)가 만든 특수 다층 거울을 사용한다. 이 거울의 표면 매끄러움은 원자 한 개 두께보다 작은 오차를 허용한다.
자이스의 설명에 따르면 이 거울을 독일 국토 전체 크기로 확대해도 가장 큰 요철이 1mm가 채 안 된다. 현존하는 가장 평평한 인공 표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거울 수십 장을 거치며 빛이 손실되기 때문에, 애초에 만들어진 EUV 빛 중 실제 웨이퍼에 도달하는 비율은 극히 일부다.
주석을 쓰는 데는 이유가 있다. 주석 플라즈마는 13.5nm 영역에서 효율적으로 빛을 방출하는 특성이 있어 EUV 광원에 최적이다. 다른 금속으로는 이 파장대 빛을 효율적으로 뽑아내기 어렵다.
EUV 광원의 변환 효율은 매우 낮다. 레이저 에너지가 실제 쓸 수 있는 EUV 빛으로 바뀌는 비율은 연구 환경에서도 5% 안팎에 불과하다. 나머지 95% 이상은 열로 사라진다. 바로 이 점이 EUV 장비가 전기를 어마어마하게 먹는 근본 원인이다.
전기 먹는 하마 - 왜 EUV는 전력 병목의 원인이 됐나
EUV는 극도로 전력 집약적인 장비다. 가동에 막대한 전기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흔히 전기 먹는 하마로 불린다.
업계 분석에 따르면 EUV 장비 한 대의 연간 전력 소비량은 약 10기가와트시(GWh)를 넘는 수준으로 추정된다. EUV 한 대가 작은 도시 하나에 맞먹는 전기를 쓴다는 비유가 나올 정도다. 같은 작업을 하는 이머전 DUV 장비와 비교하면 EUV는 최소 10배 이상 에너지를 소비한다.
원인은 명확하다. 1초에 5만 번 주석을 22만 도까지 가열하는 데 막대한 레이저 출력이 필요하고, 그중 극히 일부만 쓸모 있는 빛으로 바뀐다. 진공 유지, 정밀 온도 제어, 거울 냉각까지 더하면 전력 소비는 더 늘어난다.
이 때문에 AI 데이터센터의 전력 수요뿐 아니라 반도체 제조 자체가 전력 병목의 큰 축으로 떠오르고 있다. 첨단 칩 수요가 폭발하면서 팹(생산공장)에 EUV 장비가 늘어날수록 전력 인프라 부담도 비례해 커진다.
| 항목 | EUV 장비 | 이머전 DUV 장비 |
|---|---|---|
| 상대 에너지 소비 | 기준치 (높음) | EUV의 약 1/10 이하 |
| 광원 생성 방식 | 주석 플라즈마 (22만℃) | 엑시머 레이저 |
| 연간 전력 소비 | 약 10GWh급 추정 | 훨씬 낮음 |
| 변환 효율 | 매우 낮음 (5% 안팎) | 상대적으로 높음 |
| 첨단 미세공정 | 7nm 이하 필수 | 성숙 공정 중심 |
EUV 전력 수치를 두고 종종 40-50MW 같은 숫자가 거론되는데, 이는 순간 정격 전력과 연간 평균 소비를 혼동한 표현일 가능성이 크다. 정확한 소비량은 장비 모델, 가동률, 팹 환경에 따라 크게 달라지므로 단일 숫자로 단정하기보다 DUV 대비 10배 이상 전력 집약적이라는 상대 비교가 더 신뢰할 만하다.
합작 벤처에서 시가총액 거인으로
ASML이 필립스의 작은 자회사로 시작해 모회사를 뛰어넘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다.
ASML은 1984년 4월 1일, 네덜란드 필립스와 반도체 장비 회사 ASM 인터내셔널의 합작 벤처로 설립됐다. 당시 이름은 ASM Lithography였고, 직원은 단 31명. 사무실조차 변변치 않아 필립스 연구소 옆에 임시로 지은 목조 가건물에서 출발했다. 필립스 내부 프로젝트였던 노광장비를 상업화하라는 임무를 받은 미약한 시작이었다.
초기 ASML의 시장 점유율은 사실상 제로에 가까웠다. 일본의 니콘과 캐논이 노광장비 시장을 장악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ASML은 20년 넘게 EUV 기술에 끈질기게 투자했고, 자이스와 사이머(Cymer) 등 핵심 파트너와 함께 누구도 성공하지 못한 극자외선 노광을 현실로 만들었다.
결과는 극적이었다. 2026년 기준 ASML의 시가총액은 6천억 달러를 넘어서며 유럽에서 가장 가치 있는 기술 기업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한때 모회사였던 필립스의 기업 가치를 몇 배나 뛰어넘은 지 오래다.
누구도 깰 수 없는 EUV 독점
ASML의 진짜 힘은 EUV 노광장비를 만들 수 있는 유일한 회사라는 점이다. DUV 시장에서는 니콘, 캐논과 경쟁하지만 EUV는 사실상 단일 공급자 시장이다. 업계 추정에 따르면 ASML은 전체 노광장비 시장의 90%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
이 독점은 단순히 자본이나 특허만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다. 부품 10만 개를 공급하는 수천 개의 협력사 생태계, 자이스의 초정밀 광학, 사이머의 광원 기술이 수십 년간 한 몸처럼 결합한 결과다. 후발 주자가 이 생태계 전체를 복제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ASML의 EUV 장비를 사려면 미국의 수출 규제까지 통과해야 한다. 지정학적 이유로 일부 국가에는 첨단 EUV 장비 수출이 제한되어 있어, 이 기계는 단순한 산업 장비를 넘어 국가 안보와 직결된 전략 자산이 됐다.
5천억 원의 가치, 그리고 그 너머
EUV 노광장비 한 대 가격이 5천억 원에 달하는 이유는 단순한 부품값의 합이 아니다. 인류가 만들 수 있는 가장 평평한 거울, 1초에 5만 번 켜지는 인공 별, 비행기 두 대 무게의 정밀 기계가 나노미터 오차도 없이 협력해야 하는 극한 공학의 집약체이기 때문이다.
ASML이 노광장비 시장의 독점적 지위를 차지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여긴 EUV 기술에 20년 넘게 베팅했고, 그 결과 삼성과 TSMC, 인텔조차 줄을 서야 하는 유일한 공급자가 됐다. 가건물에서 시작한 31명의 회사가 모회사를 압도하는 거인이 된 과정은 기술 집착이 만들어낸 가장 극적인 성공 사례 중 하나다.
동시에 이 기계는 인류가 직면한 과제도 보여준다. 변환 효율이 5%에 불과한 광원, 작은 도시급 전력을 먹는 소비량은 첨단 반도체와 AI 시대의 이면에 자리한 에너지 문제를 그대로 드러낸다. 더 작은 칩을 향한 욕망이 더 많은 전기를 요구하는 역설인 셈이다.
EUV 장비 한 대를 둘러싼 가격, 원리, 전력, 역사를 알고 나면 스마트폰 속 작은 칩 하나가 얼마나 거대한 기술 위에 서 있는지 실감하게 된다. 다음에 첨단 반도체 뉴스를 접할 때, 그 칩이 어떤 5천억 원짜리 기계의 인공 별빛을 거쳐 탄생했는지 떠올려보면 기술 뉴스가 전혀 다르게 읽힐 것이다.